낭독은 읽기가 아니라 말하기입니다. 이것 역시, 수도 없이 반복해서 말씀드리고 있어요.
그렇다면, 낭독이 말하기라면요, 말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선행되어야 할까요?
어린아이가 말을 배우기 위해서는 무엇이 선행되어야 하지요?
바로 듣기입니다. 아마도 수만 번쯤 들어야 '엄마'라는 말을 하려고 시도라도 할 수 있게 될 겁니다. 낭독도 마찬가지죠. 많이 들어야 더 잘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글을 쓰는 작가들이 책을 많이 읽는 것과도 같습니다. 많이 읽지 않고 글을 잘 쓰는 작가는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들어야 할까요?
탁월하게 잘하는 낭독자의 것만 들으면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고수의 낭독도 당연히 들어야겠지만 함께 공부하는 동료들의 낭독도 많이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보다 조금 더 오래 공부한 선배들의 낭독과 이제 막 시작한 후배 격의 낭독자들의 것도 역시 많이 들어보면 좋습니다. 모든 낭독에서 배울 점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또 하나 직면할 일이 있습니다. 나의 낭독도 많이, 정말 많이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낭독은 도저히 못 듣겠어요."
"듣고 나면 다시는 낭독 안 하고 싶을 것 같아요."
"남과 비교하게 돼서 괴로워요."
이런 말씀들을 듣게 됩니다. 그 심정 알죠. 얼마나 손발이 오그라듭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이 들으셔야 합니다. 그래야 낭독이 성장합니다. 하고 싶은 것만 하고 하기 싫은 건 외면하면서 원하는 걸 얻을 수는 없습니다. 다시 작가님들을 소환하면, 남의 글만 읽고 자신의 글을 읽지 않는다면 그 작가가 어떻게 글을 퇴고하고 어떻게 필력을 성장시킬 수 있을까요? 낯이 뜨거워지는 곤란함에도 직면해 보아야 내가 나를 키워낼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듣는다는 것이 모방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모방은 절대 안 될 말이죠. 그건 그 사람의 낭독이고, 나의 낭독은 따로 있는 겁니다. 청자의 입장이 되어 보는 거예요. 청자로서 낭독을 많이 들어 보면 귀가 트이고 내 낭독의 지향점도 잡히게 될 겁니다. 모든 것이 처음에야 어렵지만 하다 보면 또 그럭저럭 지속하게 됩니다. 내 낭독을 서슴지 않고 듣게 되면 내 목소리도 사랑하게 되고 나와 친해지는 과정도 경험하게 됩니다. 낭독은 이런 시간들을 통해 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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