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조어 ‘줄 서는 사람’
수십 년 전 박경리 작가님은 대하소설 [토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이 방편으로 살면 못쓰는 법이다. 그것은 왜놈의 사고방식이야.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는 신의지, 방편으로는 길게 못 가느니, 요즘 풍조가 너에게도 미쳐 있다니 한심스럽구나.”
맥락 없이 제시하니 좀 심한 말인 듯싶을 수 있지만, 연로한 아버지가 막내아들에게 주는 교훈인 걸을 알면 좀 이해가 될 겁니다. 방편이 아니라 신의로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인데, 문득 이 말에 마음이 울컥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렇게 방편으로 사는 사람이 못 되기 때문입니다. 최근 몇 년간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방편으로 사는 모습들을 보게 되었고 그것에 사르트르처럼 구토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말이 위안이 된 것입니다.
칸트는 “사람을 도구가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정언명령으로,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어느 경우에도 예외가 없는 명령입니다. 행위보다 의도를 중시했던 칸트는 남을 돕는 일을 했어도 그것이 누군가에게 인정이나 칭찬을 받기 위함이었다면 선행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칸트 쌤 존경합니다. 나는 마음에서 스스로 우러나오지 않는다면 소위 선행이라는 것도 잘 안 합니다. 남들 다 하니까, 안 하면 체면 구길까 봐 억지로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생각입니다. 구걸하는 사람에게 얼마의 돈을 주는 것, 이재민을 위한 성금, 하물며 헌금까지. 내가 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 느닷없이 할 뿐, 허울로는 안 합니다. 남편이 어느 날 물었습니다. 오늘 감사헌금을 했던데, 왜 그랬냐고요. 뭐라 답했을까요.
“감사해서요.”
이런 나는, 때로 남보다 문제해결력이 부족해 보일 때도 있고 쉬운 길 두고 돌아가는 듯 느껴지기도 합니다. 누구누구에게 부탁하면 쉽게 해결될 거라는 조언을 들어도 스스럼없이 부탁할 관계가 아니라면 실행하지 않습니다. 상대에게 부담을 지우고 갚지도 못하면서 그의 힘을 이용하는 것은 체질에 맞지 않습니다. 그러니 쓸데없이 강직하다고, 유난스럽다고 하는 말을 듣습니다.
방편으로 사는 사람들은 마음속에 다른 꿍꿍이가 있습니다. 상대방을 칭찬하거나 그의 일을 도울 때에도 미래를 생각하며 저축하는 마음일 겁니다. 나는 세련되게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좋지만, 꿍꿍이를 가지고 세련된 척하는 사람보다는 차라리 투박하고 교양 없어 보여도 있는 그대로를 내보이는 사람이 더욱 좋습니다.
박경리 선생님은 [토지]를 약 25년여에 걸쳐 쓰셨는데 그 시대적 배경이 일제강점기였던 맥락에서 위의 대사가 나왔습니다. 방편으로 사는 것을 ‘요즘 풍조’라고 표현했지만, 그 요즘은 별도의 때가 아닌 듯합니다. 늘, 언제나, 혹은 ‘점점 더’ 일 수도 있겠습니다. 지금 시대처럼 정보기술과 영향력이 중요한 때에는 치고 빠지는 식으로 사람을 이용해 먹는 경우를 부지기수로 보게 되니까요.
내가 나름대로 신조어를 만들었습니다. ‘줄 서다’ 혹은 ‘줄 서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누군가를 탄탄한 동아줄로 알고서 붙잡고 매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알고 보니 이 줄이 썩은 동아줄이다 싶으면, 혹은 더 든든한 줄을 발견했다 싶으면, 잠시 번뇌하고(혹은 계산하고) 얼른 다른 줄로 갈아탑니다. “누구누구는 줄 서는 사람이에요.” 했더니 그 말 들으신 분이 웃으시며 참 재미있는 표현이라고 하시더군요. 사실 우리 주변에는 이런 식으로 웃을 일이 많습니다.
내 주변의 사람들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나를 방편으로 여기는, 나에게서 무언가를 얻을 것으로 기대하며 내 곁에 있는 사람은 없을까요? 그보다 더 다급한 질문이 있습니다. 내가 혹 그런 사람으로 살고 있는 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