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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시딘 Feb 11. 2020

페리오 후레쉬 치약

“30분 정기 콜 시간입니다. 고객을 위한 진심을 담아 성실하게 임해주시기 바랍니다.”

안내방송이 끝나자 사무실이 수런대기 시작했다. 희윤은 짧은 한숨을 쉬고 핸드폰에 충전기를 연결했다. 서랍에 든 서류뭉치를 꺼냈다. 엑셀파일에 빽빽이 적힌 전화번호에 눈앞이 아찔했다.      


“고급 고객들이니 한 두명만 건져도 꽤 괜찮을거야.”

제이호텔 레스토랑의 로고가 흐릿하게 박힌 종이뭉치를 건네주며 부팀장은 고개를 흔들었다. 부팀장은 스물여섯, 첫 사회생활을 이곳에서 시작한 희윤을 안스러워했다. 처음 이곳에 오는 보험설계사들 대부분이 그렇듯 희윤도 ‘이틀 교육을 듣고 시험을 보면 백만원의 돈을 주는’ 증원에 작업을 통해 이곳에 왔다. 대기업 로고가 찍힌 명함도 신뢰를 더했다. 그러나 백만원의 돈을 순순히 주진 않았다. 수습이라는 형태로 3개월간 근무를 해야 한다. 아무리 귀가 여문 성인이라도 ‘증원이 곧 돈’이 되는 이곳 시스템에서 말발이 익은 팀장급들을 뿌리치는 건 쉽지 않다. 반복된 주입을 통해 약간의 장밋빛 미래를 보게 되고, 나름의 의지로 이곳에 남는 사람들처럼 취준생이었던 희윤도 그랬다. 일단 도전해보자고 생각했다. 대신 영업에 가족과 지인들을 동원하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사무실 벽에 붙은 팀별 실적 곡선의 절벽 아래로 시선을 던지면 그곳에 희윤의 이름이 있었다. 수습 기간 한달이 지나가고 있지만 실적은 단 한건도 없다. 대한민국의 개인정보가 얼마나 심각하게 유출되고 있는지 희윤은 지난 한달간 뼈저리게 깨달았다. ‘구글링’을 통해 엉성한 검색의 뜰채를 던졌음에도 건져올릴 수 있는 신상파일이 무척이나 많았다. 합격자, 파견근무자, 문화센터 회원, 협회 회원 등. 업종별로 무수히 많은 협회들은 정보 관리에도 허술했다. 닥치는 대로 전화를 하고 메일을 넣었지만 단 한건도 성공하지 못했다. 화풀이와 성추행의 대상이 되는 전화도 이제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꿈에 전화 통화를 했던 사람들이 나와 그녀의 얼굴에 침을 뱉거나 몸을 더듬는 날들이 많아졌다. 조금 더 대범해지자고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부팀장이 준 파일속 사람들도 별다를 건 없었다. 무작정 화를 내거나, 연락처의 출처를 따져물으며 화를 냈다. 그래, 그들이 화를 낼 만도 하다고 생각했다. 무덤덤하게 다음 순번의 번호를 눌렀다. 짧은 신호음 후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미도 고객님 안녕하세요. 예스생명에서 좋은 상품이 있어 전화드렸습니다.”

조용히 불쾌한 티를 내고 전화를 끊거나 화를 내겠지. 반응을 기다리던 희윤에게 여인은 잠시 뜸을 들였다.

“음.. 안녕하세요. 소개해 주시죠.”

약간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희윤은 책상에 흩어진 상품설명서를 읽기 시작했다. 어쩌면 타인과의 대화에 굶주린 사람일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차라리 그런 사람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대화처럼 상품소개가 오간 후 그냥 공손히 전화를 끊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네, 설계사님. 잘 들었습니다. 좋은 상품 같은데요. 설계 한번 부탁드려도 될까요?”


기쁜 마음보다 수상한 마음이 드는 것은...... 아마 그녀가 자신을 믿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안이 벙벙했다. 그래도 실제 보험설계라는 것을 한번 해 볼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렇다. 희윤은 단 한건의 설계도 해 보지 못한 것이다. 전화 속 여인에게 대강의 정보를 받은 희윤은 그녀를 위한 서류를 만들었다.  ‘수당이 높은 상품’이 아닌 사업비를 줄이고 보장에 충실한 상품을 넣기 위해 검토하고 확인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출력을 마친 그녀는 여인이 알려준 강남의 주소지로 향했다. 가기 전 비품 창고를 열어 가져갈만한 판촉물을 살폈다. 연말이라 텅빈 비품창고에 쓸만한 것이라곤 치약 뿐이었다. 플라스틱 케이스에 담긴 여행용세트와 정품 치약을 서너개 쇼핑백에 챙겨넣고 서둘러 사무실을 나섰다.      


 -크리스틴의 카운슬링 센터

압구정로데오역을 빠져나와 길가에 보이는 육각형의 육층 건물, 미도빌딩 5층. 카운슬링 센터는 5층을 사용했다. 인터폰 버튼을 누르자 이름을 확인한 후 문을 열었다. 

“센터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비서로 보이는 정장차림의 여자는 희윤을 응접실로 안내했다. 이끼색을 포인트로 그레이 컬러를 조화킨 인테리어가 차분하고 고급스러웠다. 장기 밀매나 대출조직 같은 영화에서 본 수상한 회사를 상상하기도 했던 희윤은 마음이 한결 누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솜털처럼 가벼운 사람들이 즐겁게 떠다니는 푸른 배경의 샤갈 그림이 걸려있었다. ‘샤갈’의 서커스였다.      


“설계 마음에 듭니다. 여기 서명하면 되나요?”

찰랑거리는 단발머리를 귀에 꼽은 그녀는 서명 란을 가리키며 활짝 웃었다. 가입자 정미도. 크리스틴 정으로 알려진 그녀는 희윤은 몰랐지만 유명한 역술인이었다. 유학 후 해외에 근무하다가 신내림을 받고 서울에 와 카운슬링 센터를 냈다. 기다리면서 그녀의 센터 설립 초기 인터뷰들을 읽었다. 


 - 에덴동산을 나온 인류가 서커스 같은 세상을 견디는 일은 질서와 룰입니다. 확실히 보이는 것은 풀고, 애매한 일이라면 그 존재 유무를 자신이 결정할 수 있어요. 그게 곧 룰이 됩니다. 그 질서와 룰을 판단하는 일을 제가 도와드리는 거죠.


기사를 읽으며 희윤은 그녀가 신내림을 받은 점쟁이라기보다 인생철학 강사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사람도 보험이 필요한건가?      


희윤은 서명한 계약서를 건네받아 가방에 넣으며 책상위에 올려진 홍콩을 소개한 책자에 눈길을 두었다. 당장 여행 계획은 없지만 우연히 손에 들어왔고, 꽤 재미있게 보았다. 

“저 책 좋죠? 저도 얼마전에 봤거든요.”

“아! 여행계획 있어요?”

"그런건 아니에요. 여행가이드나 여행 관련 책 좋아해요. 아.. 사실은 여행다닐 돈이 없으니까. 돈이 많으면 열심히 다녔을지도 모르죠."

희윤은 가방을 집어들었다. 크리스틴은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웃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희윤을 바라보았다.

“그러게. 큰 돈을 벌어 여행다닐 팔자는 아니에요. 돈 주머니가 안보이네요.”

“그런게 보이세요? 아..... 그렇죠. 대학에서 ‘문송한’ 죄인이라 취업도 힘든데, 로또 같은것도 제 운명엔 없나보네요.”

크리스틴은 고개를 끄덕였다. 


“돈벼락을 맞을 사람들은 들어올 때부터 어깨에 커다란 돈주머니가 붙어있는게 보이죠. 근데 그 무게가 상당해서 그걸 감당해야 합니다. 꼭 이번생에서 하는 건 아니고요. 전생에 했을수도 있고, 다음 생에 올 수도 있죠. 그런 특정한 복보다는 전체적인 운을 관망해서 그때그때 마음을 다스리고 선택을 잘하는게 중요해요.”

테이블에 바짝 당겨앉은 희윤은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저도 무척 궁금하거든요. 작년에 졸업은 했어요. 사학에 경영을 복수전공하긴 했지만 정말 취업이 안됐거든요. 거짓말 안하고, 정말 열심히, 성의껏 쓴 이력서를 백개 넘게 넣었는데도요.”

희윤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크리스틴은 고개를 끄덕이며 생년월일 시를 적어넣는 상담용 종이를 내밀었다. 빈칸을 채운 그녀는 입술을 한번 깨물었다. 


“우연히 들어오게 되었지만 보험설계일도 열심히 해보고 싶었어요. 핑계같지만 가입을 권하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부담을 줄 순 없잖아요. 사실 회사에선 보험에 대한 교육을 하지 않아요. 판매할 때 주의사항만 알려 줄 뿐이죠. 상품을 제대로 알려주기 위해 자산관리사 공부도 하고 있지만, 이것도 영업을 할 수 있어야 도움이 되는거고요.”

희윤은 선배들에게도 할 수 없는 하소연을 하고나니 속이 시원해졌다. 이래서 사람들이 점술가를 찾는 것일까. 크리스틴은 진지하게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설계 해온 상품이 꽤 좋더라고요. 희윤 씨가 어떤 맘으로 일을 하는지 알 것 같아요. 워낙에 성실하고 정직한 사람이니. 계속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을 거에요. 꼼수도 못부리고.”

크리스틴은 따뜻하게 웃으며 희윤을 바라봤다. 


“이제 운이 바뀌고 있어요. 올해 취업운이 발하기 전에 사람들한테 엄청 치이는 건 피할 수 없고. 일단 거긴 빠져나와요. 더 들어가면 나오지 못해서 취업운도 거두질 못할거야.”

눈을 동그랗게 뜬 희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만두고 일단 여행을 가요. 기세를 전환하려면... 홍콩도 좋지. 홍콩은 무엇이든 시작하기 좋은 기운을 가진 곳이거든요. 희윤씨와 잘 맞아.”

입을 딱 벌리고 함박웃음을 띤 희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갈거에요. 꼭! 홍콩에선 꼭 미도카페 토스트와 밀크티를 마시고...”

탄성을 지른 크리스틴은 소리내어 웃었다. 

“나도, 거기 좋아해요. 새로운 기를 받아들일 에너지를 얻도록 충분히 기름진 식사를 하고 마음을 채우기 좋은 곳이에요. 내 한글 이름도 미도 잖아. 이름이라는 건 기를 부르는 역할을 하니까요. 아무튼..”

잠시 아득한 얼굴이 되었던 크리스틴은 희윤을 쳐다보며 단호하게 덧붙였다.

“생각보다 빨리 다시 시작할 기회가 오니까, 지금 일은 접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심적으로도 무장 해야 하고요. 매번 새로운 도전과 모험이 기다리는, 신나는 직장생활을 하게 될 거에요. 그래도 직장생활이란 뭐 힘들지만.”

“감사합니다. 저 그렇게 해볼께요.”


책상위에 놓인 책을 보며 희윤은 당장 비행기표를 끊고 홍콩을 다녀온 후 구직활동을 다시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마음을 읽은 듯 크리스틴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자 그럼, 점사엔 복채가 필수인거 아시죠?”

아.. 그럼요! 당황한 희윤은 가방을 열어 지갑을 찾았다. 결국 이것이 목적이었나, 나는 호구처럼 또 당하고 만것인가. 보험이야 취소하면 그만일텐데. 그래도 좋은 말을 들었으니 되었다고 희윤은 마음을 다독였다.  이런 희윤의 생각을 읽었는지 크리스틴은 책상 서랍 속에 있는 붉은 종이를 꺼내 부적을 써서 희윤에게 내밀었다. 부적까지.... 묻지도 않고 부적을 쓰는 건 좀 곤란한데.  어쩔 줄 모르고 부적처럼 얼굴이 빨개진 희윤을 크리스틴은 씩 웃으며 바라보았다. 


“평탄히 제 운명으로 걸어갈 때 방해꾼들을 물리쳐줄 부적이에요. 기한은 3년이고 이후엔 태우도록 해요. 3년째 되었을 때 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태운 후 타서 먹이면 물리치는 효과가 있어요. 단 그만큼 자신에게도 댓가가 돌아온다는 거 잊지 말아야 하고요.”

지갑을 만지작거리는 희윤을 바라보며 크리스틴은 조용히 덧붙였다. 

“복채는 거기, 쇼핑백에 든거 놓고 가면 됩니다. 깨끗이 닦고 정화하는 물건이죠? 당신처럼 맑은 사람에게 받은 물건 제 기도 맑게 만들어 주니 복채로 손색이 없어요."

희윤은 쇼핑백안의 판촉물 페리오 치약들을 꺼내들었다. 크리스틴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제가 부적의 기운이 닳을 때까지 다시 꼭 오겠습니다. 그땐 복채도 제대로 드리고요. 그때까지 여기 계실거죠?”

희윤의 말에 어깨를 으쓱한 크리스틴은 팔짱을 끼고 덧붙였다. 

“모든 것은 선택이죠. 그쪽도 제 말대로 할지 저도 여기 계속 있을지 모든 것은 선택의 문제라 알 수 없어요. 인간은 매 순간 변하는 존재니까요.”     


첫고객이 된 정미도, 아니 점술가 크리스틴 정이 준 부적을 희윤은 소중히 가방에 넣었다. 텅 비어있던 실적 차트엔 오늘 일로 붉은색 선이 추가되겠지만 이제 희윤은 그곳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지하철 역에 들어섰을 때 스마트폰의 알림 팝업이 뜨는 소리가 들렸다. 얼마전에 접수한 ‘큰곰약품’의 서류전형에 합격했다는 메시지였다. 그녀는 바로 홍콩행 비행기표를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음이 느껴지는 정미도 고객님께 홍콩에 다녀온 후 다시한번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땐 판촉물 치약 말고 제대로 준비한 선물을 주고 싶다고, 좀 더 단단해진 모습으로 그녀를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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