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은규 '손목의 터널'
나이가 들면 견고해 질 줄 알았다. 몸과 마음, 혹은 그 모두를 채우게 될 무엇이든.
이렇게 낡은 터널 안에 홀로 남게 될 줄은 몰랐다.
약해지는 건 순식간이라고 순옥은 생각했다. 남편이 아침으로 먹은 토스트와 우유잔이 싱크대에 얌전히 들어 있었다. 컵을 놓쳐버린 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작고 투명한 유리컵은 매끄러운 실크장갑도 아닌 세제 거품을 잔뜩 품은 분홍 고무장갑 끝에서 미끄러졌다. 움켜쥐려고 힘을 쓰다가 미끄러지거나 누군가 치고 지나간 것도 아니었다. 손에 힘이 빠지며 그저 스윽, 바닥으로 떨어졌다. 두툼하게 깔린 주방매트 위로 떨어진 탓에 유리컵이 깨지진 않았지만 컵을 놓치고 손을 오므린 순간 손목에 시큰한 통증이 몰려왔다. 손등에 가까운 손목을 시작으로 훅 피어난 통증은 팔꿈치를 거쳐 두툼한 팔뚝, 어깨까지 타고 올라갔다.
“손목터널증후군입니다.”
주부들에게 흔한 질환이라며 의사는 시큰둥한 얼굴을 했다. 오전이었지만 피곤해보이는 그는 검은 배경이라 더 하얗게 보이는 그녀의 손목 부분을 가리켰다.
“이쪽 통로로 신경들이 지나갑니다. 그 신경에 문제가 생긴거죠. 손목을 많이 쓰시는 분들, 주부님들도 그렇고요.”
그러니까, 정확히 어디가 안 좋은 거냐고 되묻는 그녀의 질문에 피곤한 얼굴의 의사는 그러니까 증후군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증후군이요. 원인은 하나가 아닌거죠. 신경과 근육도 그렇고 또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모른다는 거죠, 전문가인 의사선생님도요?”
날선 그녀의 말에 의사는 미간을 찌뿌렸다. 벗겨진 이마가 눈이 부실만큼 환한 LED등에 번들대며 역광을 뿜어냈다.
보송한 면타월이 깔린 물리치료실은 낡았지만 아늑했다. 동그랗고 큰 도너츠를 마이크처럼 괴어 놓은 기계에 손을 넣었다. 붉은 원적외선이 손목주변으로 새어나와 흩어졌다. 오른손 팔목으로 따뜻한 기운이 번져나갔다. 손목안의 터널 그 빈공간에 쬐여질 붉은 광선을 상상했다. 그 안을 천천히 걸어간 시간들, 이제는 그녀의 터널을 벗어난 두 아들과 남편의 얼굴이 떠올랐다.
두 아들을 돌보고 또 밥을 하고 청소를 하고 집안일을 하고. 운전을 하거나 가계부를 쓰기도 했다. 인생의 터널을 지날 세 남자의 일상이 쾌적하도록 순옥은 최선을 다했다. 자신의 터널이 무너지고 금이 가는 것을 돌아 볼 틈도 없었다. 가끔 낡고 눌리는 부속물의 통증을 호소하며 자신을 돌아봐달라고 그녀의 손목을 잡기도 했을 것이다. 가족들 앞에서 뿌리쳐버린 자신의 손목이 이제는 통증으로 그녀의 안부를 묻는다. 잘 지내고 있냐고, 잘 살고 있는 것 맞냐고. 몸이 보내는 안부를 이렇게 듣는다. 의료 기기 안에서 새어나오는 붉은 빛으로 통증을 토닥이며 그녀는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빈둥지 증후군이야. 강아지라도 키워보든가.”
초등학교 1학년인 아이를 픽업가야 한다며 팔자좋은 언니가 부럽다고 심드렁하게 덧붙인 동생은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침침한 눈으로 책장을 펼쳐도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습관처럼 리모컨을 눌렀다. 텔레비전에서 웃고 떠드는 사람들의 젊음과 에너지가 부러워져 그만 끄고 만다. 다시 정오의 햇빛이 영사기처럼 먼지들을 잘게 반사하는 대낮의 적막에 홀로 남았다. 증후군, 원인을 알 수 없는 통증과 외로움 속에서 나는 얼마나 더 버텨야 하는 것일까.
-나는 터널처럼 외로웠다
문득 떠오른 구절을 그녀는 작게 읊조린다. 모두가 떠나간 그녀의 터널 안, 50년을 넘게 살아온 인생처럼 명확한 것 하나 없는 증후군의 시작. 모호한 통증과 아픔, 슬픔, 볕을 받지 못한 눅눅한 우울이 냉동실의 오래된 시루떡처럼 무겁게 켜켜이 쌓여 가슴을 누른다. 몸과 마음의 통증이 지나가는 터널 안에서 순옥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터널 속을 불안한 공기가 흔들리며 길게 휘파람을 불고 지나간다. 좁고 공허한 터널을 울리는 휘파람소리, 그 안의 빈 둥지들, 자신의 것으로 채우지 못한 50년의 세월이 허허롭게 비어있다. 그녀의 어깨가 가늘게 떨린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낡고 오래되어 이끼만 자라고 있는 터널 안에 녹물같은 눈물이 흘러내린다.
이은규
통증을 곁에 두고 보다가
늦은 진단을 받았다
몸이 마음에 보내는 어려운 안부
손목터널증후군
손목의 뼈와 인대 사이에 난 통로
같은 방향을 향해 한 줄기 신경이 지나가는 길
모든 증후군은
여러 개의 증상이 하나의 병으로 연결되지만
그 까닭을 알 수 없을 때 이름 이어진다
나는 터널처럼 외로웠다는
철도원의 아들이었던 한 시인의 문장
그는 어릴 적, 터널을 바라보며
오래 기다리는 법을 익혔을 것이다
한 손목이
뿌리침으로 인사를 마치고 돌아갈 때
남겨진 손목에 생긴 터널
텅 빈
통증 사이로 드나드는 바람
끝나지 않을 듯 긴 터널을 통과하는 불안이다
어두운 조명 속으로 흩어지는 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