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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시딘 Mar 09. 2020

아무 해도 끼치지 않는 말차*

- 고야 '고야와 의사 아리에타'

향수 바꿨네.

유식은 아내 진아를 보며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시트러스 계열이다. 관수가 레몬이나 귤을 좋아했던가.

진아는 생각에 잠긴 유식을 바라보며 어이없는 얼굴로 입술을 내밀었다.

“내 향수에 관심이 다 있었어? 차나 드셔.”

“차향에 섞이니까 그렇지. 많이 뿌렸나봐.”

출근 준비를 마친 그녀가 통통통, 하늘로 솟을 듯한 특유의 걸음걸이로 식탁을 스쳐 커피를 집어 들었다. 향수냄새가 더 분명히 코에 들어왔다. 그런데, 저 검은 속옷이 비칠 만큼 얇은 베이지컬러의 꽃무늬 블라우스는 또 뭔가. 진아의 옷차림과 쇼핑패턴이 바뀐 것은 확실했다.


자꾸만 눈에 보이고 의심하게 되는 것들로 그는 머리가 아팠다. 경찰, 과학수사팀 소속인 그녀는 제복을 입지 않는다. 공무원으로서 자부심을 가진 그녀는 주로 그레이와 블랙계열의 수수한 옷차림을 즐겨했다. 무심히 찻잔 바닥을 바라보았다. 말차 찌꺼기들이 원형의 컵 바닥에 난잡하게 흩어져 있다. 물과 잘 섞이지 않은 모양이다. 요즘 하는 일들이 다 그렇다. 찻가루를 섞는 일에도 집중을 할 수가 없다. 그는 거칠게 찻잔을 개수대에 내려놓고 물을 틀었다.

기분이 상한 듯한 그의 모습에 아내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진하게 내린 커피를 호호록 소리를 내 마시고는 유식을 흘겨보며 입을 열었다.

“기분전환하려고 하나 사봤다. 짠돌이, 지금 돈 썼다고 그러는 거야?”


불신 지옥. 광화문역을 빠져나와 향하던 유식은 흰바탕에 붉은 페인트로 쓴 커다란 피켓을 들고 있는 남자를 유심히 바라봤다. 예수천국 불신지옥. 조악한 여덟 글자 중 ‘불신’에서 핏방울처럼 페인트가 간간히 흘러내렸다. 앞에 네 글자를 쓰고 붓을 다시 페인트 통에 담갔다 쓴 것 같았다. 남자가 그곳에 나타난지는 몇 년도 더 된 것 같았지만 유식의 눈에 띈 건 얼마 전부터였다. 바로 그 ‘불신’이라는, 피흘리는 두 글자가 선명하게 다가오면서 부터다.


모든 것은 빌어먹을 담석증 때문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오른쪽 옆구리부분이 아프고 소화가 안됐다. 지식인은 그의 증상이 소화불량, 혹은 역류성 식도염이거나 췌장암일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암은 아니었다. 병원에선 매번 다른 처방전을 쥐어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날도 유식은 아침부터 쑤셔오는 배를 부여잡고 출근했다. IT회사 기획팀장으로서 변호사인 친구 관수와 법률자문을 겸한 점심약속이 있었다. 약을 털어 넣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말차통을 집어들었다. 가루를 뜨는 손이 통증으로 미세하게 떨렸다. 쏟은 가루를 적신휴지로 찍어냈다. 온도도 맞추지 않고 팔팔 끓는 물을 말차 잔에 넣은 그는 개운치 않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신경을 거스르는 통증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회의실 너머에 관수가 특유의 장난스런 표정을 지으며 그를 보고 웃었다. 그 모습을 보며 그는 통증으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지금 바로 수술이 가능합니다.”

의사의 말에 엿가락처럼 구부린 몸을 간신히 펴고 유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회사부근의 작은 외과 병원은 환자가 없는 탓인지 진료와 수술을 신속하게 진행했다. 담석이라고 했다. 신장 뒤편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간단한 수술로 없앨 수 있다고 의사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위협과 불신으로 가득 찬 수술동의서에 관수가 서둘러 사인을 했다. 유식은 새우처럼 몸을 구부린 채로 베드에 눕혀져 수술실로 빠르게 옮겨졌다. 옷을 갈아입고 마취과 의사가 다가왔다. 심호흡을 마저 끝내기 전에 그는 허공을 향해 팔을 두어 번 휘젓고 정신을 잃었다. 이 모든 일이 한시간이 채 지나기 전에 일어났다.


공기 중의 무거운 무언가가 그의 눈꺼풀을 아래로 끌어당겼다. 그는 빵부스러기를 모으듯 온 몸을= 구석구석 천천히 인지하며 조금씩 움직여 보고 힘겹게 눈을 떴다. 하얀 천정이 흐릿하게 눈에 들어왔다. 전과 다른 통증이 오른쪽 배에 후끈하게 퍼졌다.

“아직 움직이지 마시고요. 무통 놨으니 곧 괜찮아지실 겁니다.”

사람이 시야에 들어오지 않아 목소리는 벽에서 스며 나오는 것 같았다. 조용히 침대가 움직였다. 문이 열리고 그의 침대는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시 좁은 복도를 거쳐 병실로 들어갔다. 그곳에 관수가 있었다. 셔츠차림으로 아이패드를 들여다보던 그는 그가 들어오자 자리에서 일어나 소매를 걷고 간호사의 지시대로 침대위로 올라갔다.


“자, 힘껏 당겨주시면 됩니다.”

관수는 고개를 끄덕이고 유식이 누워있는 침대시트를 잡아당겼다. 섬세하게 근육이 붙은 그의 팔뚝에 힘줄이 불거졌다. 퇴원하면 운동을 시작해야 겠군. 두툼히 살이 잡힌 뿌연 몸이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녀석은 늘 에너지가 넘쳤다. 공부도 운동도 열정적으로 해치우는 관수를 보면 질투 섞인 동경이 일어나곤 했다. 그는 그런 시선마저도 즐기며 에너지로 보탤 줄 알았다. 그게 신기했고, 그걸 신기해하는 유식과 있는 것이 관수는 즐거웠다. 그렇게 둘은 친구가 되었다.


“자, 이게 나왔습니다. 대단하죠? 30분 만에 꺼낸 겁니다.”

의사는 검은 얼룩이 박힌 갈색덩어리가 든 비닐봉투를 들어보였다. 쓸개와 위장사이에 있었다는 그 담석은 계란보다 조금 큰, 일그러진 타원형이었다. 유석은 간신히 고개를 돌려 돌을 바라보고 입을 딱 벌렸다. 관수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넌 몸에 저만한 게 들어있었는데도 몰랐냐?”

의사는 웃으며 유식의 수술부위를 살피고 고개를 끄덕였다.

“통증이 심했을 텐데 용케 참으셨네요. 수술은 잘 됐습니다. 지금부터 한시간정도 절대 주무시면 안 됩니다. 보호자분이 계속 깨워주세요. 전신마취라 확실히 호흡과 맥박을 돌려 놓지 않으면 위험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사업 이야기는 나누지 마세요. 거의 기억하지 못하거든요. 한 시간 후에 간호사 불러서 확인하시고 주무시면 됩니다.”


유식은 자신이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이유 중 하나가 쏟아지는 잠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지방에 간 아내가 병원까지 오려면 두 시간은 더 있어야 한다고 했다. 관수는 시계를 보며 사무실에 전화를 했다. 미안하고 고마웠다.

“나 혼자 있을 수 있어. 잠들지 않을게.”

관수는 어이없는 얼굴로 혀를 끌끌 찼다.

“이미 잠들어 있잖아. 눈 떠봐. 널 어떻게 깨우지? 때릴 수도 없고.”

관수는 계속해서 이런저런 질문을 했다. 유식은 퐁당퐁당 잠속으로 빠졌다가 어설프게 깨어났다. 의식의 틈으로 수술부위가 묵지근하게 느껴졌다. 순식간에 그 무게가 사라지면 그 틈으로 관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유식, 일어나봐. 안되겠다. 진짜 잠이 확 깨는 얘길 해 줄까?”

“그래, 제발 그런 얘길 해봐라. 무슨 얘길 해도 힘들 것 같은데.”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유식의 의식은 허공으로 흩어졌다. 구멍 뚫린 수세미같은 아득한 곳에서 에코음을 더해 관수의 목소리가 꿈처럼 들려왔다. 몽롱하게 도취된 그의 저음.


“진아는 정말 죽여주는 여자라고. 정말..... 너에게 아까운 여자라니까. 와이프 친구인 진아를 너에게 소개시켜주겠다고 한건, 순전히 내가 그녀에게 접근하기 위해서였어. 너 아냐?”

순간, 의식의 구멍에서 폭죽이 일었다. 잠의 파도위로 거센 바람이 몰아쳤다. 그러나 눈은 쉽게 떠지지 않았다. 유식은 미간을 찡그리며 눈을 가늘게 뜨고 이미 도취상태로 접어든 관수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진아가 오기로 한 시간이다. 그녀는 관수와 미경의 아파트를 좋아했다. 늘 꽃을 사왔다. 푸른빛이 도는 수국. 그렇게 관수부부의 집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걸 즐겼다. 아마로네 와인을 브리치즈와 살라미, 올리브를 곁들여 먹는다. 그리고 그녀의 친구이자 관수의 아내, 미경의 커다란 스텐텀블러에 페퍼민트 차를 진하게 우려 마셨다. 진아의 귀여운 악취미였다.

“이건, 내겐 일종의 최음제랄까.”

그 문장이 시작이었다. 금지된 사랑에 빠진 연인은 시계를 보며, 허용된 시간에 쫓기며 열정적으로 사랑을 나눈다. 관수는 그녀에게 시트러스 계열의 향수를 선물했다.

“시트러스는 잡벌레를 쫓아준다고.”

진아는 향수를 받아들고 톤 높은 목소리로 웃었다. 웃음으로 오는 그 작은 떨림으로도 그녀의 가슴이 멋지게 출렁인다. 도톰한 입술에 다갈색 피부를 가진 육감적인 그녀. 확실히 유식이 같은 녀석에겐 아까운 여자라고 관수는 생각한다. 일주일에 한번, 혹은 그 이상 그녀를 마주할때마다.


“너 자고 있지? 그럴 줄 알았다. 눈떠봐.”

유식은 눈을 뜨지 않았다. 이 순간, 자신은 친구에게 살해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수가 그의 어깨를 붙잡고 뼈가 스러질 듯 세차게 흔들었다. 그는 그대로 목뼈를 꺾어 떨구고 눈을 뜨지 않았다. 놀란 관수가 간호사를 부르러 나갔다. 유식이 눈을 번쩍 떴다. 툭 떨어진 눈물을 얼른 손을 들어 훔쳤다. 그리곤 눈을 꼭 감고 부들거리는 윗입술을 꼭 깨물었다.


*


불신. 붉게 피흘리던 글자들은 뭉게지고 퍼져 머리에 찌든 때처럼 엉겨붙었다. 유식은 탕비실에서 말차통을 집어들었다. 찬물과 더운물을 섞어 넣고 저었다. 작게 난 창문으로 고궁이 작은 사진첩처럼 보였다. 9월 둘째 주, 여름도 가을도 아닌 계절이 액자 구석에서 시간을 구겨가며 사라지고 있었다.

“아, 오늘도 그냥 그렇네.”

블랙믹스커피를 훌훌 마신 김대리가 컵 바닥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벌레라도 빠졌나?”

“커피 찌거기로 점보는 거죠. 해리포터에도 나오잖아요.”


유식은 컵에 든 차를 한 번에 털어내듯 마셔버렸다. 목구멍이 후끈해지며 쓰린 느낌이 들었다. 김대리가 시키는 대로 접시위에 빈 찻잔을 뒤집은 후 반시계방향으로 세 번 돌린 후, 손잡이를 그의 몸 쪽에 두었다. 손잡이를 중심으로 왼쪽이 과거, 오른쪽이 현재라고 했다. 유식은 살짝 긴장된 마음으로 컵을 뒤집었다. 지렁이처럼 길게 꼬리를 문 말차가루가 양쪽에 나란히 있었다. 김대리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건.. 뱀, 밧줄형태잖아요. 과거나 현재,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 모르지만 그닥 유쾌하진 않은 일이네요. 아, 수술 하셨잖아요. 그건가 보다.”

김대리는 서둘러 탕비실을 나서며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유식은 찻잔바닥을 들여다보며 손가락을 넣어 찌꺼기를 휘저었다. 의심과 불신. 낡은 녹색의 가루가 컵 바닥에서 이물질처럼 흩어졌다. 이렇게 흩어지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창밖을 보았다. 초록빛도 갈색도 주황도 아닌, 숲과 풀의 색은 어떤 단어로도 이름붙일수 없이 애매모호했다. 그렇지만 그 존재를 불신할 순 없었다. 그저 숲은 시간에 따라 자신을 바꾸며 존재할 뿐.


모든 것이 눈앞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이제,  의심은 그저 눅눅한 하늘로 흩어질 뿐이었다. 아내의 어깨가 그에게 기대오는 밤이 되면 그는 태연히 , 저렇듯 모호한 숲의 빛으로 얼굴색을 바꾸고 세상을 속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황인찬 시집 <사랑을 위한 되풀이>에 수록된 시 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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