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영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대학시절, 짧지만 봐야할 것이 산더미 같았던 유럽 배낭여행에서 벨베데레 궁에 있는 갤러리를 일정에 넣은 건 전적으로 이 소설 때문이었다. 브뤼셀의 왕립미술관에 간 것도 그의 소설 때문이었다. ‘유디트’와 ‘마라의 죽음’을 직접 보고 싶었다. 90년대 중반 김영하의 소설은 당시 문학동아리에서 문자 그대로 ‘핫이슈’였다. 장르 문학이 익숙하지 않았던 그때, 내면을 대중없이 파고들거나 정치 사회적 문제를 다룬 소설들이 한없이 지루하게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왕가위, 하루키의 지극히 개인적이고 물질적인, 화려한 서사들에 몰두해있던 우리는 김영하의 이 작품에 열광했다. 당시엔 젊은 출판사였던 문학동네가 발굴한 파격적인 젊은 작가였다. 귀걸이를 한 예민해 보이는 경영학도 소설가! 사실 20년이 넘은 이 작품은 그러나 ‘클래식’, ‘고전’이라는 단어를 붙이기엔 약간의 아쉬움이 느껴진다. 한국소설이 변화하던 시기, 변화하는 한국문학에 단초를 제공한 소설로 기억된다. 뒤를 잇는 아련한 추억은 덤이다.
유디트, 미미, 그리고 에비앙
자살안내업자, 총알택시 운전사K와 구상미술가C 형제, 형제에 엮인 여자 세연, C와 작업을 하는 행위예술가 미미, 그리고 자살안내업자가 여행에서 만난 홍콩 여인까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전체 이야기의 작가인 듯 보이기도 하는- 자살안내업자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각 챕터는 그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자살안내업자는 자살을 안내하며 소설을 쓰는 작가다. 작품을 위해 고객을 찾던 업자는 영화 <천국보다 낯선>을 보러 온 세연을 만난다. 그녀는 두 형제에게 엮여 있지만 사랑과 삶의 권태에 빠진 그녀는 그의 고객이 되기로 한다.
또 다른 고객 미미. 그녀는 행위 예술가이지만 자신의 모습을 영상매체로 남기는 것을 극도로 꺼린다. 그녀에게 매혹된 C는 그녀의 모습을 비디오아트에 담고 싶어한다. 다가가지 못하는 두 사람, 결국 그녀는 그가 찍은 영상을 보며 한없이 세상으로부터 도망치려 발버둥치던 자신을 발견하고 자살을 결심한다. 자살안내업자는 클림트를 닮은 두 여인의 자살을 도와주고, 자신의 작품을 마무리한다. 떠나가도 변하는 게 없는 무료한 인생을 일갈하며.
역시 요약이 힘든 소설이다. 각 챕터는 1인칭으로 각자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제는 좀 식상한 느낌의 미술사에 대한 이야기도 당시에는 상당히 신선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무엇보다 젊은 작가 특유의 힘이 느껴지는 과감한 문장들이 인상적이었다. 그동안 한국문학에서, 특히 주류 남성문학에서 보이던 관음적인 성적묘사가 아닌 과감하고 직접적인 성과 섹스에 대한 묘사들이 흥미로웠다. 지금은 좀 진부하게 느껴지지만 당시엔 참 파격적으로 와 닿았다. 더 자극적인 장르문학들과 영상 매체들이 즐비한 요즘, 다시 보니 힘이 들어간 문장에 실소가 터지기도 했다. 시대가 이렇게 변했다.
박제된 나비, 타자화 된 세 명의 여자
소설을 다시 읽으며 눈에 들어온 건 시작한 건 자살안내업자가 만난 세 명의 여자들이다. 학대를 거듭한 삶에서 형제 사이를 오가다가 자살을 선택한 세연, 교사와 불륜 사건을 겪고 부유하는 삶을 살아갔지만 자신을 직시하지 못하는 미미, 그리고 여행 중 만난 홍콩여인 또한 성적으로 착취당하는 일을 겪은 것으로 짐작된다.
C가 핀으로 꽃아 수집하던 나비처럼 그녀들 모두 타인, 구체적으로 남성에 의해 유린당하는 일을 겪었다. 세연과 미미는 죽음조차 안내업자의 도움을 받는다. ‘멀리 떠나가도 변하는 게 없’는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그로테스크하게 펼쳐진다. 소설에 등장하는 세 명의 남성 중에, 그나마 여자를 직시하는 인물은 총알택시 기사 K뿐이다. 그 스피드로 자본주의적 현실을 질주하며 달아나려 하는 인물인 그는 세연을 진심으로 사랑한다. 형에게 그녀를 빼앗기고도 -사실 빼앗겼는지 모호하다- 현실 앞에서 어쩔 수 없다. 그의 모호한 마음처럼 작가의 여자들에 대한 마음도, 입장도 모호한 느낌이다. 이 작품을 쓸 때 작가는 예상이나 했을까? 이십 오년이 넘게 흐른 지금, 페미니즘 이슈가 질릴 만큼 문학의 이슈가 되리라는 걸 말이다. 물론 우리는 많은 부분에서 여전히, K처럼 방관하고 있다는 것도.
현재 시점에서 자기복제를 반복하는 김영하 소설가의 작품을 생각하면 그의 데뷔는 상당히 파격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사실 자기복제도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그 시대 데뷔한 작가들 중에 아예 작품을 쓰지 못하는(혹은 쓰지 않는) 이들도 많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것이 바로 레트로!
94년형 스텔라 DX, 올드 스파이스 로션, CD플레이어... 90년대에 20대를 보낸 나에겐 추억의 단어들이다. 특히 ‘75년 1월 21일생’이라고 적힌 세연의 주민등록증이 등장하는 순간 실소가 터져 나왔다. TV나 유튜브를 통해 더 유명해진 김영하 작가의 작품은 아마 이전보다 많은 독자들이 볼 것이다. 20대들이 이 책을 읽으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다.
이 책과 함께 단편집 <호출>은 나에게 추억의 책이다. 그의 등단작이 실린 ‘리뷰’지도 갖고 있다. 국문학 전공에서 배우던 고리타분한 소설들과는 다른 느낌에 김영하, 배수아, 하성란, 정이현의 작품을 열심히 읽었다. 다른 작가들보다 그 시대의 문화코드를 직접 반영한 작가였다. 다시 읽으며 소설의 내용과는 관계없는 개인적인 감성이 살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사르다나팔, 한번쯤 마주치고 싶은 당신
자신을 ‘사르다나팔’의 자리에 놓는 마지막 챕터는 신인작가의 과감한 자신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의 에너지들이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이젠 작가보다는 ‘엔터테이너’의 느낌이지만 나에게 여전히 김영하는 작품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젊고 파격적인' 소설가다.
어차피 그녀는 그의 삶에 틈입한 곰팡이 같은 존재였다. 건조하게 살았으면 생기지 않았을, 건물의 음습한 곳에서만 서식하는 그런 곰팡이처럼 그녀는 그의 의지와 는 상관없이 삶 구석구석을 균열시켜 놓았다. (p54)
주문진 출신의 작부 세연을 애국자 유디트, 클림트의 작품 속 ‘유디트’로 바라볼 수 있는 패기 있는 작가였다. 레너드 코헨의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미미의 모습은 사실 좀 오글거렸다. 그러나 그 시대에, 젊은 그였기에 가능한 장면이 아닐까 싶다. 작가는 지금도 자신의 예전 작품들을 꾸준히 보며 수정한다고 한다. 아마 이런 장면들을 보면 고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소설 자체보다 나에게는 오래전 추억여행, 처음 읽었던 시절을 떠오르게 한 작품이었다. 레트로란 이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책이 고전으로 남을지 알 수는 없지만 나에겐 그 시절을 추억하게 할 고전으로 남을 것 같다. 그때 산 책들을 참 많이 버렸는데(사실, 공동 수상작이었던 책은 진작 처분했다) 아직 서가에 남긴 것은 아마 책 자체보다는 책에 얽힌 기억들을 간직하고 싶은 이유도 있을 듯 싶다. 사는 건 스무 살을 갓 넘긴 그때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만 또 그런 것이 인생이라고, 사르다나팔이 되고 싶었던 그때의 젊은 작가는 지금의 나에게 말을 건넨다. 40대가 된 나에게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이 글을 보는 사람들 모두 일생에 한번쯤은 유디트와 미미처럼 마로니에 공원이나 한적한 길 모퉁이에서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 나는 아무 예고 없이 다가가 물어볼 것이다. 멀리 왔는데도 아무것도 변한 게 없지 않느냐고, 또는 휴식을 원하지 않느냐고. 그때 내 손을 잡고 따라 오라. 그럴 자신이 없는 자들은 절대 뒤돌아보지 말일이다. 고통스럽고 무료하더라고 그대들 갈 길을 가라. (p1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