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동아시아 문명 교류사의 빛, 무령왕릉》
✼ 무령왕릉 발굴 50년 특별전 ✼
대전은 한때 공주의 외곽 농촌 마을이었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넓은 밭〔한밭〕이었을 뿐이었던 대전은 공주목에 속하는 구역이었다. 대전이 충청의 중심 도시가 된 것은 불과 100여년 전의 일이다. 하지만 한때 대전이 대한민국의 임시수도였던 적이 있다. 한국전쟁 때 서울을 내주고, 수원(3일)을 거쳐, 대전에 임시수도를 마련했으나 20일 만에 대구로 밀려난다(결국 부산까지 내려간다.)
공주는 예전에 곰나루라 불리던 곳이었다. 곰의 설화에서 유래한 지명이었고, 한자를 음차하여 '공주'라 쓰고 '곰주'라 읽는 도시가 되었다. 공주는 천년 넘게 대전보다 큰 도시였고, (대전과 마찬가지로)한때 한 나라의 수도였던 적이 있다. 한성을 수도로 삼던 백제가 고구려에게 한성을 내주고 밀려 내려와 웅진〔지금의 공주〕에 수도를 마련했고, 급히 마련한 수도 웅진이 마땅치 않았는지 무령왕 때 국력을 회복하여 60여년 만에 성왕 때 사비〔부여〕로 천도했다.
고구려, 신라에 비해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은 백제의 (거쳐가는)수도였던 공주는 그나마도 무령왕릉 덕분에 역사적인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도굴되지 않은 채 묘지석이 함께 발굴된 무령왕릉은 피장자가 누구인지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백제의 왕릉이다.
1971년 7월 7일, 송산리고분군 7호분(무령왕릉) 발굴은 매우 긴박(하고도 허술)하게 진행되었다. 장마철이 되어 6호분 배수로 공사 도중 우연히 발견한 7호분 발굴에는 불과 17시간이 소요되었다. 부장품이 5천여 점인데, 그 많은 유물을 정확한 기록을 남기지 않은채 거의 쓸어담듯 발굴한 것이다. 장마철이기도 했고, 발굴 당일에 바로 신문 기사가 나가는 바람에 도굴 위험에 노출되기도 했었지만, 여러 모로 행정 처리나 발굴 기술 면에서 아쉬운 점이 많았다.
그래도 무령왕릉임을 알 수 있게 해준 묘지석이 발견되었고, 뿔 달린 돼지 진묘수〔국보 162호〕가 입구에서 묘를 지켜주고 있었고, 합장된 무령왕 부부의 목관도 일본산 금송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잘 남아 있었다.
무령왕릉은 벽돌무덤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벽돌무덤은 백제에서만 발견되는 양식인데, 남한에서 볼 수 있는 벽돌무덤은 바로 옆에 있는 6호분을 제외하면 한두 개 정도가 더 있을 뿐이다. 6호분은 일제강점기 시절에 가루베 지온이라는 도굴꾼이 깨끗하게 쓸어가는 바람에 누구의 묘인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렸지만, 벽돌무덤의 훌륭한 양식미를 갖추어서 무령왕과 비슷한 시기에 그와 버금가는 인물을 위한 묘로 만들어 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다행히 7호분(무령왕릉)은 6호분과 너무 가깝게 붙어 있어서 였는지 가루베 지온이 눈치채지 못했고, 천오백 년 동안 봉인이 해제되지 않고 살아 남았다.
무령왕릉 부장품 5천여 점이 모두 전시된 것은 이번 특별전이 처음이다. 공주 신관리 석실고분과 송산리고분, 공주박물관에서 열린 특별전을 둘러보고 〈초가집〉에서 맛난 수육과 칼국수를 먹고, 기념품샵에서 사 온 《고대 동아시아 문명 교류사의 빛, 무령왕릉》을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