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_
그는 기대감으로 책 표지를 넘긴다. “우리 사이에 칼이 있네”라는 섬뜩한 문장으로 시작하는 소설을 읽을 참이다. 사흘 전 그는 작가의 가장 많이 팔린 작품을, 그 다음 날엔 가장 논쟁적인 작품을 읽었다. 역사적인 사건을 다루거나, 한 가정의 일상사를 다룬 그 작품들에서 그는 인간다움의 본질이 작가의 섬세한 문체 속에 솜씨 좋게 녹아 있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는 의문했다. 문학이나 예술에 순위가 있다면, 그 기준은 무엇이어야 할까.
2_
그는 스토리를 개의치 않는다. 행복하지 않아도, 비극적이지 않아도, 혹은 결말 없이 끝나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가 바란 것은 언어가 그저 매개체의 위치에 머물지 않고, 언어가 곧 하나의 세계로 존재하는 경지였다. 언어는 감정을 더 선명하게 만들고 사고를 가능하게 하지만, 언어가 글이 되고 말이 되는 순간 그것은 감정이나 생각 그 자체가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 설명은 쉽게 오해를 산다. 희랍식 논증으로는 그 어떤 누구도 설득할 수 없다.
작가의 작품에서 이야기는 주변 인물들의 시선으로 그려진다. 메시지는 직접적으로 말해지지 않는다. 언어는 단지 색채와 소음을 생생하게 구현하는데 복무할 뿐이다. 뻔하거나 지루하지 않아야 하고 친숙한 것도 낯설게 보이도록 만들어야 하는 어려운 임무를 띤다. 작가의 언어는 시적이면서도 소설적이고, 음악적이며 회화적이다. 문장은 즉각적으로 색채가 되고 향이 된다. 작가의 글은 고요하며 아름답다. 비극적인 장면에서조차도.
아름답다는 표현의 진부함을 굳이 벗겨야 한다면, 작가의 문장은 서늘하게 찬란하다. 그는 작품을 읽는 내내 압도되었고, 끝내 순순히 굴복했다. 그리고 소설의 미학에 대한 의문을 해소했다.
3_
“힘주어 눈을 감았다 뜬다.
눈을 뜨면 모든 것이 사라져 있을 것을 각오하듯이.”
끝나지 않는 이야기의 마지막 문장에 다다랐을 때, 그는 한동안 다른 문장들을 만나고 싶지 않을 정도의 마음이 되었다. 고요가 그를 감쌌다. 그리고 이내 다시 첫 페이지를 펼쳤다. 이토록 찬란한 문장들이 환상이 아니라 여전히 내 손 안에 있음을 확인하려는 듯이.
그는 흔적 없는 종이 위에 옐로우 파스텔 색을 입혀 자신을 사로잡은 문장들을 포획하려 했다. 책은 이내 늦가을의 짙은 단풍잎이 내려앉은 산책로처럼, 고요한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다시 마주한 문장들은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으로 침묵 속에 잠긴다. 끝날 듯 끝나지 않는, 떨리는 입술로도 닿지 못할 희미한 사랑처럼.
#희랍어시간
#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