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눈사람

스노우 브라더스

by 마이즈

올해는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될 예정입니다. 기상청을 들락거리고 일기 예보도 몇 번이고 확인했다. 드디어 우리 아이의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나에게는 일곱 살 된 딸이 있다. 하얗게 눈이 쌓인 몇 년 전 겨울, 아이와 함께 눈 사람을 만들었다. 눈을 데굴데굴 굴려서 얹었다. 내가 굴린 큰 공은 아래에, 아이가 굴린 작은 공은 위에. 나뭇가지로 팔을 만들고 근처에서 돌을 주워 눈을 만들었다. 코에 당근을 꽂는 것은 진리다. 드디어 완성! 그날 밤, 아이의 그림 일기장에는 우리가 만든 눈사람이 그려졌다. 현실과 달리 빨간 머플러와 모자를 쓰고 있었다. 추워 보여서 그렸어! 그런데 이렇게 그려보니 크리스마스 같다. 우리 크리스마스에 눈사람 만들면 멋질 것 같아! 이제부터 그게 나의 꿈이야!

madmaiz_A_memory-like_scene_of_a_father_and_young_daughter_buil_75111f63-9dc.png?type=w1

퇴근길에 백화점에 들렀다. 아이가 좋아할 만한 인형을 사기 위해서다. 벌써 몇 번째 백화점인지 모르겠다. 우리 딸은 특이하게도 알파카를 좋아한다. 어딘가에서 본 영상에 꽂혔다나? 하지만 알파카 인형은 흔하지 않다. 그래서 이렇게 여러 백화점을 돌고 있는 것이다. 결국 조금 멀리 떨어진 다섯 번째 백화점에서 찾아냈다. 크리스마스 일주일 전의 일이었다. 그래도 구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마지막까지 구하지 못했다면 다른 것을 사야 했을 텐데. 아이가 좋아하는 모습이 기대된다.

madmaiz_A_man_standing_alone_in_a_quiet_department_store_at_nig_76eb70fe-174.png?type=w1

크리스마스 당일. 일기 예보에서 말한 대로 함박눈이 펑펑 내렸다.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여기가 도시라면 넘쳐나는 빛이 반사되어 더욱 예쁘고 화려한 날이겠지? 하지만 내 주변은 적막했다. 캐럴 같은 것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자동차 헤드라이트 이외에는 달 빛만이 존재했으며, 바닥에 쌓인 눈은 운전을 힘들게 했다. 느릿느릿 움직이는 것은 비단 눈 때문 만은 아니었다.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차갑고 외로운 집으로는. 적어도 오늘 만큼은 빛이 있는 곳에 존재하고 싶었다.

madmaiz_A_car_slowly_driving_on_a_snow-covered_rural_road_at_ni_44e1ba65-20f.png?type=w1

저 멀리 논 한가운데에 희미한 빛이 보였다. 그곳으로 차를 몰았다. 논 한가운데 건물이 있었다. 오락실이었다. 이런 곳에 왜 오락실이 있지? 문득, 오늘 같은 날 위안을 느끼기에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심스레 발을 들였다. 크리스마스인데도 여전히 게임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대부분 노인들이었다. 역시 요즘 세대가 할 놀이는 아니겠지. 아이를 데려와 볼까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게임을 구경하다가 스노우 브라더스를 발견했다. 혼자 보내는 크리스마스와 어울리는 게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전을 넣고 게임을 시작했다.

madmaiz_An_arcade_interior_with_an_old_arcade_machine_glowing_s_1e601ff8-e38.png?type=w1

오랜만이라 기억이 가물가물 했지만, 게임 자체는 심플했다. 화면에 있는 괴물들에게 눈을 던진다. 괴물들을 눈 뭉치로 만들어서 굴리면 되는 방식이다. 눈 덩어리를 굴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아련한 감정이 느껴졌다. 눈을 열심히 굴려보지만 결국은 터뜨리게 된다. 그래야 괴물을 물리치고 다음 판으로 갈 수 있다. 이 게임에서는 눈 덩어리를 쌓을 수는 없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라고 해도 눈 사람을 만들 수는 없는 거구나. 그래. 어쩔 수 없지.

%ED%99%94%EB%A9%B4_%EC%BA%A1%EC%B2%98_2025-12-24_202025.png?type=w1


땡그랑


어느새 다가온 어린 소녀가 동전을 넣었다. 우리 딸보다는 조금 나이가 있어 보였다. 왜 내가 하고 있는 게임에 동전을 넣는 걸까? 그리고 버튼을 누르자 화면에 빨간색 눈사람이 생성되었다. 같이 하고 싶은 걸까? 하지만 소녀는 게임을 하지 않고 자리를 떴다. 어? 어? 어떻게 해야 하지? 나도 모르게 빨간 눈사람을 지키기 시작했다. 소녀가 돌아왔을 때 빨간 눈사람이 죽어 있으면 실망할지도 모른다. 필사적으로 지켜내던 빨간 눈사람. 문득, 우리 딸이 그린 그림 속 눈사람이 떠올랐다.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안돼. 게임에 방해가 된다. 저 아이를 지킬 수 없게 돼! 참아야 해!

SE-876e5a6e-e1b9-4d69-996d-3c69b2ff1ce0.png?type=w1

들뜬 마음으로 크리스마스 아침을 맞이했다. 몸 단장을 하고 딸이 살고 있는 아파트 앞에 도착했다. 이혼할 때 정했던 아이 면접은 2주에 한번 주말. 오늘은 본래 아이를 만날 수 있는 날이 아니다. 하지만 면접 교섭권을 정할 때 예외 사항으로 약속한 것이 있었다. 이혼 후 첫 번째 눈이 내리는 크리스마스에는 만나는 것. 함께 눈사람을 만들면서 아이가 말했던 꿈, 그 약속만큼은 반드시 이루어 주고 싶다고 했다. 아파트 앞에 주차하고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 아내는 딸을 보내주지 않았다. 내년에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공부해야 할 것이 많다고 했다. 크리스마스에 무슨 공부냐고 했더니 이번에는 친구들과 기대하던 일정이 있다고 했다. 다른 아이들과 공연을 보고 단체로 파티를 할 거란다. 당신은 아빠가 돼서 언제 철이 들래? 그 애가 친구들과 보내려고 기대하던 시간을 눈이 온다는 이유로 취소하라는 게 말이 돼? 당신을 위해 아이가 무언가를 포기하게 만들고 싶어?

madmaiz_A_man_standing_beside_a_parked_car_in_falling_snow_phon_6383cc5e-7f7.png?type=w1

결국 빨간 눈사람은 녹아 버렸다. 나는 지켜내지 못했다. 게임 오버. 옆에 내려둔 알파카 인형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동전 교환소 근처에 있는 소녀에게 다가갔다. 이 아이도 알파카를 좋아할까? 소녀는 인형을 받아 들었다. 어쩐지 작게 미소를 짓는 것 같았다. 소녀가 내 손을 잡아 손바닥을 펼쳤다. 그 위에 100원짜리 동전 10 개를 얹었다. 어쩐지 알 것 같았다. 이 동전의 개수는 아이의 입장에서 가장 큰 가치일 것이다.


“메리 크리스마스.”

이전 11화투어 모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