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디우스
땡그랑
우주 공간에 떠 있는 전투기의 이름은 빅 바이퍼. 잠시 후 이상하게 생긴 기체들이 줄을 지어 달려든다. 그들을 한 대도 남김없이 격파한다. 빨간색으로 빛나는 신비한 코어가 나왔다. 빅 바이퍼를 조종해서 그 앞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코어를 먹었다. 계기판의 첫 번째 칸에 불이 들어왔다. 스피드 업. 하지만 나는 선택하지 않는다.
대학을 졸업하고 한동안 취준생 시기를 보냈다. 많은 친구들이 취업과 면접 스터디에 매진했다. 학원을 다니거나 스펙을 만들기 위한 공모전에 참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 어느 것도 함께하지 않았다. 묵묵히 혼자서 준비할 뿐이었다. 만약 다른 노력을 했더라면 조금은 더 빠르게 일 자리를 구할 수 있었을까?
빅 바이퍼는 우주 공간을 지나 어느 행성으로 들어간다. 지면에 있는 포대에서 탄환이 날아온다. 이를 피하며 적의 기체를 격추했다. 빨간색으로 빛나는 신비한 코어가 나왔다. 기체를 조종해서 그 앞으로 이동했다. 탄환 사이를 누비며 코어를 먹었다. 계기판 첫 번째 칸의 불이 꺼지고 두 번째 칸의 불이 들어왔다. 미사일 기능이다. 하지만 나는 선택하지 않는다.
취업 후 가장 힘들었던 것은 직장 선배들이었다. 그들은 내가 잘한 일은 말하지 않고 실수하는 부분에 대해서만 언급했다. 억울한 일도, 화가 나는 일도 많았지만 꾹 참고 버텼다. 선배들이 말했다. 다 너를 위해서야. 당연히 그 말은 나에게 와닿지 못했다. 몇 번이고 이직 생각을 했다. 내가 없어져 봐야 다들 후회하지 않을까? 그래야 나의 소중함을 깨닫지 않을까? 하지만 나는 결국 끝까지 버티며 회사에 남았다. 묵묵히 혼자서 참아낼 뿐이었다. 만약 이직을 했더라면 더 좋은 환경으로 갈 수 있었을까?
빅 바이퍼가 들어간 행성은 천장이 있는 신기한 구조였다. 위에도 아래에도 땅이라니. 우주에는 이런 행성도 있는 거겠지. 위아래가 다 지면이다 보니 양쪽으로 포대가 나타났고 더 많은 탄환이 쏟아져 날아왔다. 하지만 나의 조종 실력은 그보다 더 나았다. 요리조리 피하며 적의 기체를 격추했다. 빨간색으로 빛나는 코어가 나왔다. 빅 바이퍼를 조종해서 그 근처로 이동했다. 탄환 사이를 누비며 코어를 먹었다. 계기판 두 번째 칸의 불이 꺼지고 세 번째 칸의 불이 들어왔다. 더블이다. 하지만 나는 선택하지 않는다.
어느 정도 경력이 쌓이며 직급이 생겼다. 나를 괴롭히던 선배들도 이제는 서로 믿을 수 있는 든든한 동료가 되었다. 다 나를 위해서였다는 선배들의 말이 이제야 조금씩 이해되는 느낌이다. 회사 생활은 말 그대로 무난했다. 큰 스트레스도 없었고 그렇다고 큰 기쁨이나 성취도 없었다. 그저 톱니바퀴의 부품 중 하나로 기능할 뿐이었다. 그러던 중 의외의 연락이 왔다. 새로운 기술과 플랫폼이 생기는 시기였다. 그 탓에 우리 회사의 서비스에도 위기론이 나오고 있었다. 나의 서비스 경험을 높이 사주는 사람이 나타나며 스카우트 제안이 들어왔다. 연봉은 지금의 두 배였다. 하지만 나는 끝내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만약, 새로운 기술을 익히고 더 큰 연봉을 받았더라면, 나는 지금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을까?
빅 바이퍼는 쏟아지는 적의 공격을 피해 전진했다. 놈들보다 나의 조종술이 뛰어난 덕분이다. 저런 느려터진 탄환에 맞아줄 생각은 없다. 그러자 이번에는 행성 자체가 나를 방해하기 시작했다. 이상한 세포 벽이 생겨나며 앞길을 막았다. 총을 쏴서 제거해도 금세 다시 생겨났다. 때마침 빨간색 코어가 떠다니는 것이 보였다. 빅 바이퍼를 조종해서 빠르게 먹고 돌아왔다. 계기판 세 번째 칸의 불이 꺼지고 네 번째 칸의 불이 들어왔다. 레이저 기능. 이 무기라면 세포벽을 한 번에 뚫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선택하지 않는다.
회사는 점점 힘들어졌다. 경쟁 업체들은 빠르게 신 기술을 도입했고 새로운 플랫폼으로 연이어 진출했다. 뒤늦게 쫓아가려고 했지만 이미 격차가 크게 벌어진 상태였다. 그 과정에서 많은 동료들이 회사를 떠났다. 경쟁 업체로 이직한 경우도 많았고 아예 다른 업종으로 전환한 분들도 있었다. 선배들도 대부분 떠났다. 회사 입장에서는 위기를 극복할 무언가가 절실했다. 어느 날 대표님이 나를 호출했다. 사활을 건 프로젝트를 내가 맡아 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우리 회사를 위해 올곧게 버텨낸 분이잖아요. 아니다. 나는 그저 다른 선택을 할 용기가 없었을 뿐이다. 이번도 마찬가지였다. 대표님은 여러 솔깃한 제안을 해주셨지만 나는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만약, 그렇게 중요한 프로젝트를 내가 해냈다면, 지금의 나는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을까?
총알을 퍼부으며 동시에 빅 바이퍼를 세포벽 사이로 욱여넣었다. 기체 후방에서는 무서운 속도로 벽이 재생되었다. 하지만 두렵지 않았다. 무기에 의존할 필요는 없다. 나의 조종술만으로 극복해 낼 수 있다. 결국 세포벽을 뚫고 나왔으나 더 많은 적들의 공격이 이어졌다. 동시에 작은 세포벽들이 천장과 바닥에서 돋아났다. 모두가 나를 처치하기 위해 달려들고 있다. 그들의 연계로 인해 피하는 것도 점점 힘들어졌다. 문득, 외로움이 느껴졌다. 저들은 모두 한 마음으로 달려들고 있다. 나만 다른 방향을 보고 있구나. 정신없이 탄환을 피하며 적을 격추하는 동안 나도 모르게 빨간색 코어를 먹게 되었다. 네 번째 칸의 불이 꺼지고 다섯 번째 칸의 불이 들어왔다. 옵션. 하지만 나는 선택하지 않는다. 하나만 더 먹으면 "?" 에 도달하니까. 버티자.
결혼을 하기에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던 것 같다. 큰 회사는 아니지만 오래 다니며 임원급에 가까운 진급을 했고 모아둔 돈도 꽤 있었다. 처음에는 부모님 친구분을 통해 선을 봤다. 몇 사람을 만났지만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이후 결혼 정보 회사를 통해 많은 분들을 만났다. 이번에도 먼저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만약 상대가 결혼하자고 했다면 거절하지는 않았을 것 같지만, 그 누구도 먼저 언급하는 경우는 없었다. 다들 내가 먼저 말해주기를 바랐던 걸까? 아니면 내가 결혼 상대로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일까? 나는 끝내 결혼을 하지 못했다. 만약, 누군가와 가정을 이루었다면 지금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자녀나 손주를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지 않을까?
적들의 갑자기 사라졌다. 분위기가 이상하다. 잠시 후 땅이 울리며 화산이 폭발했다. 불꽃이 나를 향해 날아든다. 적들의 움직임은 예측이 가능하지만 화산은 그렇지 않다. 최대한 멀리 떨어져서 총을 난사했다. 나를 향해 달려드는 불꽃과 돌을 격파해야 한다. 바로 아래에 빨간색 코어가 보였다. 무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빅 바이퍼를 하강시켜 코어를 먹었다. 다섯 번째 칸의 불이 꺼지고 여섯 번째 칸의 불이 들어왔다. 여기가 계기판의 마지막 칸이다.?로 표기되어 있지만, 나는 이 기능을 알고 있다. 방어막 생성이다. 이 것을 사용한다면 폭발하는 화산으로부터 나를 지켜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기능을 쓰는 것은 정말 아슬아슬한 순간이다. 가급적이면 선택하지 않아야 한다.
부모님은 여유가 있는 분이셨다. 그 덕분에 나는 평생 큰 고생 없이 지냈던 것 같다. 회사가 위기였을 때, 남들과 달리 크게 동요하지 않은 이유일지도 모른다. 최악의 경우에는 든든히 나를 받쳐줄 두 분이 계시니까. 학창 시절, 친구들이 학자금 대출을 받고 아르바이트를 하는 동안에도 나는 용돈을 받았다. 어학연수도 다녀왔고 무언가 부족하다고 느낀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그렇게 나를 받쳐주던 부모님도 결국 세월의 힘 앞에 쓰러지셨다. 혼자가 된 시점이 되자 상속 이야기가 나왔다. 빚과 자산을 파악한 뒤 상속을 받을지 포기할지를 정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돌아가신 부모님의 무언가를 파보는 느낌이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나는 상속을 포기했다. 재산을 확인하지도 않은 채. 그리고 남은 돈을 모아 시골에 집을 사서 내려왔다.
결국 화산 폭발 속에서도 끝까지 배리어 기능을 사용하지 않았다. 이제 곧 보스가 나온다. 빅 바이퍼는 행성을 관통하여 다시 우주 공간으로 진출한다. 그 안에 빨간색 코어가 하나 떠 있다. 이미 계기판은 여섯 번째 마지막 "?" 기능에 불이 켜져 있다. 저 코어를 먹으면 다시 첫 번째 칸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 누구도 그런 어리석은 선택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코어를 향해 돌진했다.
“항상 아무런 선택도 하지 않으시네요.”
어느새 다가온 소녀가 화면을 보며 말했다. 계기판의 일곱 번째 불이 꺼지고 다시 첫 번째 칸의 불이 켜졌다. 고양감이 생긴다.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다. 겨우 한 바퀴 돌았을 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