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 팡
아일랜드의 아침. 창문으로 따스한 햇살이 들어온다. 창 밖에서 고양이가 문을 두드린다. 미안~ 집안에 들어오면 안 돼. 오늘도 상쾌한 기분으로 달려 나간다. 동물들이 있는 축사의 빗장을 제거하고 문을 연다. 내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개와 말이 뛰어나온다. 축사 안으로 들어가서 건초를 옮긴다. 우걱우걱. 말이 건초를 씹는다. 조심스럽게 산란 상자를 열어본다. 오늘은 알이 있다. 주변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집어 든다. 축사 밖으로 나오는데 어느새 눈치챘는지 꽥꽥 거리며 거위가 달려든다. 이크! 얼른 도망치자! 예전에 물린 적이 있었다! 알파카가 거위와 나의 추격전을 멀뚱멀뚱 바라본다.
폴란드에서는 카페 종업원으로 일하며 다양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덴마크에서는 한국 요리 워크숍을 열었다. 김치도 만들었고 닭갈비도 만들었다. 외국인들과 다 함께 김밥을 말아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인도네시아의 섬나라에서는 홈 스쿨링을 하는 아이들을 위해 미술 수업을 했다. 마치 작은 천사들 같았다. 버스가 다니지 않는 외딴곳을 몇 시간씩 걷기도 했다. 풀을 먹고 있는 동물들을 피해서 조심조심. 유럽 어느 나라에서는 히피들과 어울려서 노래를 배우고 포크 댄스를 추기도 했다. 홍콩 밤거리의 화려한 간판들은 내가 특별한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해 주었다. 그렇게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내고 돌아왔다.
나는 뭐든 할 수 있을 거야! 이렇게 다양한 모험을 했잖아! 귀국 직후에는 자신감이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내가 경험을 통해 얻은 것들을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으나 이 역시 녹록하지 못했다. 다들 자랑한다고 오해하는 것 같았다. 억울했다. 이를 통해 함께 성장하고 싶었을 뿐인데. 단순히 놀러 나갔던 것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에게 여러 번 상처받았다. 이는 취업에도 영향을 미쳤다. 면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경험으로 이 시간을 언급하면, 이상만을 추구하는 사람으로 오해받았다. 현실 감각이 부족하다는 소리까지 들었다. 언젠가부터 나는 조금씩 이 일을 언급하지 않게 되었다.
오랜 시간이 지났다. 한때 세상을 누비던 경험은 어느새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이야기가 되었다. 어느새 할머니가 되었다. 창문으로 따스한 햇살이 들어오는 아침. 밖을 내다보면 정겨운 논과 밭이 보인다. 이제는 이 시골이 나의 세상이다. 아일랜드의 목장과 유럽의 섬 마을은 마치 꿈처럼 희미하다. 몸을 일으켜 문 밖으로 나가지만 딱히 할 일은 없다. 아무것도 없는 휑한 주변을 바라보다가 문득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들판에 풀을 뜯는 동물들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집 안에 갇혀 있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그렇게 동네 주변을 걷기 시작했다. 오늘은 어쩐지 모험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 평소에 가지 않던 길로 들어섰다. 논길을 따라 걷는 것은 나름의 스릴이 있었다. 앞으로만 곧게 이어진 길. 그렇게 한참 걷다 보니 처음 보는 건물을 만나게 되었다.
문득 해외 생활이 떠올랐다. 이렇게 무턱대고 걷다가 만나는 장소에 보물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예상 못한 맛있는 음식이 있거나 새로운 디자인 패턴을 발견하기도 했다. 한 순간 어린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들어가 볼까?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간 내부는 시끌 시끌했다. 화면을 보며 열중하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노인들이었다. 어떤 중년의 남자는 유럽의 해변가를 달리는 자동차를 보고 있었다. 핸들을 잡고 페달을 밟고 있는 것을 보면 저 차를 운전하는 중인가 보다. 하지만 그 배경이 유럽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내가 유럽에 있던 시절에 저런 느낌을 받은 적은 없었거든. 돌아다니다 보니 세계 지도 위로 비행기가 지나가는 장면이 나오는 화면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다음 장면은 두 남자가 서로 치고받는 모습이었다. 긴 여행 동안 저렇게 주먹을 휘두르며 싸우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내가 아는 나라의 모습이나 국기가 나오는 화면마다 멈춰 서서 확인했다. 축구 게임, 퀴즈 게임, 땅따먹기. 다양한 게임이 있었지만 어쩐지 위화감이 들었다. 내 기억 속에 나라들과는 무언가 달랐다.
땡그랑
동전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내 옆에 한 소녀가 서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화면을 가리켰다. 그리고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났다. 나보고 하라는 거니? 소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데 이런 걸 할 수 있을까? 게임을 시작했다. 패닉 모드와 투어 모드 둘 중에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 깜짝 놀라 소녀를 돌아봤다. 이미 그 자리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 아이는 내가 다른 화면에서 국기들만 보고 있던 것을 눈치챘던 걸까? 민망했지만, 그럼에도 아이의 마음이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틀림없이 여행하는 게임을 시켜주고 싶었던 것이겠지. 투어 모드를 선택했다.
화면이 바뀌며 홍콩의 밤거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 이 느낌이었어. 특별한 사람이 된 듯한 기분. 화면에 Ready!라는 문자가 깜빡이며 녹색 공이 튕기기 시작했다. 이게 뭐지? 손에 쥔 빨간색 막대를 움직이니 화면 속 여행자가 움직인다. 아하. 이렇게 하는 거구나. 녹색 공을 잡아보자. 열심히 여행자를 움직였다. 하지만 공에 닿는 순간, 게임이 끝났다. 아, 작살을 던져서 공을 다 없애야 하는 거구나. 요리조리 피하며 공을 하나하나 터뜨렸다. 모든 공을 터뜨리는 순간, 화면이 바뀌며 세계 지도가 나왔다. 홍콩에 있던 비행기는 인도네시아로 날아갔다. 어? 여긴 자바섬의 보로부두르잖아? 직접 가본 적은 없던 장소였다. 게임은 조금 더 어려워졌기에 이곳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게임이 끝나고 나서 한동안 멍하니 앉아있었다.
왠지 모를 충족감이 들었다. 어째서일까? 나의 경험을 단순한 자랑으로 여기던 사람들에게 이 게임을 시켜보고 싶었다. 그들도 이 게임을 하면 어쩐지 이해해주지 않을까? 하지만 여기까지 데리고 올 수도 없을 터였다. 내가 경험한 해외여행은 잘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이 게임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 차이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위해 동전을 넣었다. 해외에 나간 이유는 놀러 간 것도 관광도 아니었다. 나는 모험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게임을 하면 할수록 욕심이 생겼다. 내가 다녀온 나라들에서 기다리고 있을 공을 모두 터뜨리고 싶어졌다. 점점 게임에 익숙해졌고 실패한 자리에서 이어서 하는 방법도 알게 되었다.
오락실에 다니는 기간과 함께 기계 앞에 머무르는 시간도 길어졌다. 가끔은 다른 사람이 이 게임을 하고 있을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화면을 보지 않기 위해 멀리에서 기다렸다. 혹시 내가 직접 가지 못한 나라의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건 싫었다. 내 힘으로 거기까지 가야만 했다.
“아직도 그리워요?”
어느새 소녀가 곁에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역시 눈치가 빠른 아이다. 하지만 답하지 않았다. 화면 속의 나는 독일과 이탈리아를 지나 스페인을 모험하고 있었다. 오늘은 꼭 다음 지역까지 가볼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