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운 것

스플래터 하우스

by 마이즈

동네 영감들이 난리다. 오락실이 생겼다고 한다. 우리 남편도 매일 그곳에 들락거린다. 뭐, 나는 마음에 든다. 노인정에서 바둑이나 장기만 조용히 두는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젊게 느껴지니 말이다. 다 늙어서 뭐라도 흥미 거리가 있으면 좋은 거지. 주변 친구들에게도 화젯거리다. 저기 끝 집의 할망은 손자랑 같이 다닌다고도 했다. 남정네들만 다닐 것 같은 장소인데, 신기한 일이다. 그렇게 호기심을 갖던 어느 날, 식사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영감이 통 돌아오질 않았다. 이 참에 구경이나 가볼까 싶어 오락실에 들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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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기계음이 가득한 오락실은 어쩐지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왜 이렇게 익숙한 걸까? 난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데. 이룰 수 없었던 오랜 꿈이 이루어지는 기분이었다. 영감을 찾아야 한다는 목적은 어느새 잊혀졌다. 묘한 기분으로 하나하나의 화면을 돌아봤다. 방울을 쏘는 공룡이나 무지개를 타는 아이를 보고 있으니 어쩐 지 마음이 불편했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거지? 그렇게 하나하나 둘러보다가 구석에 있는 기계 앞에 멈춰 섰다. 화면 속에 한 남자가 쓰러져 있었고 구멍이 뻥뻥 뚫린 하키 마스크가 남자 주변에 떠 있었다. 이 장면. 틀림없이 본 적이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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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여자애가 그런 게임하면 못써. 옆에서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정하게 타이르는 듯한 말투였다. 너는 저기 귀여운 게임을 하렴. 틀림없이 나를 위해서 하는 말이겠지만 기분이 나빠졌다. 싫어요! 이거 할 거예요! 동전을 넣고 하키 마스크를 쓴 남자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괴한 괴물들이 다가왔다. 하지만 그보다 신경 쓰이는 것이 있었다. 내 귀에 들리는 소리는 화면 속 괴물들의 것이 아니었다. 진짜 무서운 것은 주변의 시선이었다. 여자 아이면 귀여운 게임을 해야지. 피가 터지는 잔인한 게임을 하는 여자를 누가 좋아하겠어? 눈치가 보인 탓에 게임에 집중하지 못했고 결국 순식간에 죽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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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에 단 한 번, 오락실에 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학교에서 소풍으로 가게 된 놀이 공원. 그 안에 있던 장소였다. 그때의 게임이 눈앞에 있는 이것이었다. 수군대는 사람들 속에 내가 좋아하던 남자애가 있었기에 그 이후로 오락실에는 가지 않았다. 여성스러운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여자는 게임을 하지 않는다. 만약 하더라도 귀엽고 아기자기한 게임을 해야만 한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일이다. 하지만 그 시절에는 여성스러움에 대한 편견이 가득했던 것 같다. 세상에도, 사람들에게도, 나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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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정말 끌리는 것은 공포라는 감정이었다. 경험하고 싶었지만, 스스로 멀리해야만 했다. 여성스럽지 못하다는 이유였다. 세상의 잣대를 탓하며 나 스스로를 가로막았던 것이다. 그나마 허용되는 것은 책과 영화였다. 게임이나 폐가 체험 같은 직접 경험은 여성스럽지 못하다고 하면서도 공포 문학이나 호러 무비를 보는 것은 개성으로 받아들여졌다. 얘가 책을 진짜 많이 읽지 뭐야. 완전 문학소녀라니까. 어떤 책을 좋아해요? 메리 셀리의 프랑켄슈타인이라거나 스티븐 킹의 캐리 같은 걸 좋아해요. 와. 너무 멋져요. 그러다 보니 스티븐 킹의 작품은 영화화된 것도 전부 보게 되었어요. 무섭지 않아요? 그것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본능인걸요. 그렇게 세상이 말하는 ‘여자’의 기준에 따라 나의 취향을 조율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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땡그랑


게임기에 동전을 넣고 앉았다. 주변을 둘러봤다. 아무도 나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내가 늙어서 인가? 아니면 시대가 변해서일까? 이제는 여자가 게임을 해도 아무렇지 않은 세상이 된 걸까? 들뜬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게임을 시작했다. 그 시절 어른들은, 남자아이들은 왜 어린 여자애가 이 게임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 걸까? 하키 마스크를 보고 13일의 금요일이라는 공포 영화를 떠올렸기에 사람들을 잔인하게 살해하는 게임인 줄 알았지만,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주인공 릭은 납치된 여자 친구를 구하려다가 사망하고 만다. 하지만 하키 마스크가 그에게 힘을 준다. 이건 공포물이기보다 히어로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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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릭이 되어 잡혀간 연인을 구하러 스플래터 하우스로 들어간다. 이 시절에 왜 잡혀가는 것은 항상 여자였던 걸까? 자신의 생명을 걸고 구하러 가는 것은 어째서 모두 남자였던 걸까? 성별을 떠나 누구라도 소중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불태울 수 있을 텐데 말이다. 괴물을 하나하나 물리친다. 어떤 괴물은 곤죽이 되어 버리고 몸이 갈라지거나 절단되기도 한다. 하지만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그동안 공포물을 너무 많이 봤기 때문일까? 지금 보기에는 너무 둔탁한 그래픽과 연출 때문일까? 만약 어린 시절에 이 게임을 했다면 충격을 받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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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무서운 것은 게임이 아닌 사람이죠.”


게임이 끝나자 곁에서 지켜보던 소녀가 말했다. 어쩐지 어린 시절의 내가 다 늙은 현재의 나에게 말을 거는 것 같은 비현실감이 들었다. 다시 동전을 넣었다. 죽은 자리에서 릭이 부활한다. 왠지 모를 쾌감이 있었다. 여자애가 이런 게임하면 못써. 귀여운 게임을 하렴. 피가 터지고 잔인한 것을 좋아하는 여자를 누가 좋아하겠어? 게임하는 여자는 여성스럽지 않아. 공포를 향한 나의 갈증을 채워주는 것은 게임이 아니었다. 문득 깨달았다. 이 게임이 구석에 있는 이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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