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동

마피

by 마이즈

잦은 야근이 반복되던 어느 날,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게 뭐였지? 질문에 대한 답은 명확했다. 영화 시나리오를 쓰는 일. 오래전부터 마음 한구석에 담아둔 생각이었는데, 그날따라 또렷하게 떠올랐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날 바로 사표를 냈다. 스스로도 위험한 판단이라고 인지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작업을 시작하자 하루하루가 빠르게 지나갔다. 글을 쓰는 시간만큼은 배고픔도, 불안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하지만 통장은 정직했다. 숫자는 줄어들었고, 나는 점점 초조해졌다. 그래도 부모님에게는 차마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대신 외할머니 댁으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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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아무것도 묻지 않으셨다. 그리고 따뜻한 밥을 차려주셨다. 그날 저녁, 할머니가 말씀하셨다. 얼마든지 오래 머물러도 좋다고. 그러면서 동네에 오락실이 있으니 마음이 복잡하면 한번 가보라는 이상한 말씀을 하셨다.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할머니의 말씀을 듣고 나가보니 논길 한가운데에 오락실이 있었다. 시골과 어울리지 않는 장소였다. 호기심이 일었지만 들어가지는 않았다. 대신 마음속으로 규칙을 정했다. 내 시나리오로 무언가 성과를 만들기 전까지는 가지 않겠다고. 시간이 지난 어느 날 휴대폰이 울렸다. 공모전 당선이라는 말이 들렸다. JD라는 영화사 이름도 함께였다. 전화를 끊고도 한동안 휴대폰을 내려놓지 못했다. 화면을 몇 번이고 다시 켰다. 글자가 사라질까 봐, 꿈에서 깰까 봐. 그날만큼은 스스로가 조금 자랑스러웠다. 나를 위한 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날 이후, 나는 오락실에 들르기 시작했다. 하루에 하나씩, 매일 다른 게임을 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인생은 도전과 경험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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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오락실 문을 열 때면 기분이 들떴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발걸음이 무거웠고, 가슴이 답답했다. 몇 시간 전의 장면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시나리오는 류상연 작가님 이름으로 나갈 겁니다. 순간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제가 쓴 이야기인데요. 상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예상한 반응이라는 듯이. 영화를 위해서예요. 무명작가 이름보다는 잘 알려진 분이 필요하다는 것. 이해하시잖아요. 말은 차분했고, 논리적이었다. 틀린 말이 아니라는 생각이 더 괴로웠다. 걱정 마세요. 작가님 이름도 크레디트에 들어갑니다. 시나리오 보조지만요. 펜이 내 앞에 놓였다. 거절하면 이 작품은 여기서 끝이라고 했다. 이미 움직인 스태프들을 생각해 달라고도 했다. 사인을 하면 내 이야기는 살아남고, 사인하지 않으면 이야기는 사라진다. 오락실 안에서도 그 장면이 계속 재생됐다. 게임기를 고르려고 화면을 훑었지만,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평소에 동전을 바꿔주던 소녀가 다가왔다. 말없이 내 손을 잡더니 한 기계 앞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동전 하나를 쥐여준다. 매일 오던 곳이었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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땡그랑.


제목은 마피. 경찰복을 입은 생쥐가 화면에 등장했다. 이 주인공 이름이 마피인가 보다. 도둑고양이들을 잡는 게임인 것 같았다. 누가 봐도 더 약한 생쥐가 고양이를 잡는다고? 마음에 들었다. 쥐도 구석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는 것을 보여주지! 시작하자마자 고양이에게 돌격했다. 하지만 고양이와 충돌하는 순간 마피가 죽어버렸다. 게임인데도 이상하게 씁쓸했다. 두 번째 목숨의 시작! 화면에 고양이들이 가득했다. 놈들이 사방에서 몰려온다. 멈추면 잡힐 것이다. 계속 움직여야 한다. 한쪽으로 몰려서는 안 된다. 도망치는 끝에 난간이 보였다. 갈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었다. 마피는 난간 아래로 떨어졌다. 두 번째 목숨도 이대로 끝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약자의 마지막은 실패일 거라고. 나의 인생도 이렇게 추락하고 말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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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바닥에 닿는 순간, 다시 튕겨 올랐다. 생각보다 높이. 그렇게 몸이 공중에 떠 있는 동안은 고양이가 부딪혀도 죽지 않았다. 추락하는 동안에도, 튕겨 올라가는 동안에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의 시나리오에 대한 칭찬도, 비판도 모두 류상연 작가에게로 향할 것이다. 나는 안전하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좋은 것일까? 튕겨져서 다른 난간으로 올라서자 잠시나마 안심이 됐다. 고양이들은 여전히 쫓아왔다. 하지만 이번엔 알 것 같았다. 떨어지는 게 끝이 아니라는 걸. 오히려 회복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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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에 가전제품들이 보였다. 저걸 훔쳐야 하는 걸까?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마피는 도둑이 아니라 경찰이니까. 도둑고양이들이 훔쳐간 물건을 되찾는 쪽이다. 하지만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오해할 수도 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나는 당당하게 나의 것을 되찾을 뿐인데. 난간을 뛰어내리고, 다시 튕겨 오르며 고양이를 피해 다녔다. 이상하게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작은 생쥐가 전보다 늠름해 보였다.


“추락했다가 회복하는 사람은 별로 없더라고요.”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나는 추락한 게 아니라고. 난간 아래로 잠깐 내려간 것뿐이라고. 다시 튕겨 오르기 위해서. 도둑고양이들이 가져간 걸, 다시 돌려받기 위해서. 왜냐고? 그들이 쫓아오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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