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아침, 깨워준 사람은 가정부 누나였다. 잠이 덜 깬 나의 손을 잡고 욕실로 갔다. 얼굴을 씻겨 준 뒤, 이번에는 식당으로 갔다. 아침 식사를 하는 사이에 어머니는 오늘 입힐 옷을 골라 두셨다. 그다음에는 기사 아저씨와 함께 방송국으로 향했다. 촬영 중간에 점심 식사를 했고, 대충 2-3시쯤 그날 일정이 마무리되었다. 집에 오는 길에 주산 학원에 혼자 내렸다. 수업이 끝날 무렵에는 다시 가정부 누나가 마중 나왔다. 집에 가면 선생님이 한 분 기다리고 계셨는데 한동안 노래 선생님이셨고 이후에는 바이올린, 종종 피아노 선생님이기도 했다. 음악 수업을 받은 뒤 저녁을 먹었다. 저녁 식사 자리는 대부분 어머니와 동생까지 함께였다. 아버지만 없었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잠시 텔레비전에서 만화를 보고 있으면 다른 선생님이 오셨고 한글이나 산수를 가르쳐주셨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이미 3학년 과정을 배웠다. 이렇게 하루의 일정이 끝나면 밤 8시 정도였다. 그때부터 과외 선생님들과 주산 학원에서 받은 숙제를 했다. 밤 10시에 방영하는 외화를 보고 싶어서 마음이 조급했다. A특공대, V 같은 작품들을 좋아했는데, 당시에는 방영 시간을 놓치면 다시는 볼 수 없었으니까. 모든 유치원 생들은 나와 비슷하게 살아간다고 생각했다.
집 앞에 놀이터가 있었다. 대문을 열 때면 매번 등 뒤에서 아이들의 노는 소리가 들렸다. 내 방 창문에서도, 2층 발코니에서도 놀이터가 보였다. 처음에는 의식하지 않았지만, 구구단을 외우느라 짜증 나던 어느 날부터 인가 아이들의 소리가 유혹적으로 들렸다. 나도 모르게 바라본 놀이터의 모습은 환상적이었다. 그네도, 미끄럼도, 시소도 아이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나도 같이 놀고 싶었다. 하지만 불가능했다. 나에게는 시간이 없었으니까. 주말은 가능하지 않겠냐고? 주말에는 좋은 가족이 되려고 애쓰는 부모님들 덕분에 집에 있는 날이 거의 없었다. 그렇게 놀이터에 대한 로망은 점점 커져갔다.
어느 밤, 숙제를 빨리 끝낸 뒤 가정부 누나를 졸랐다. 놀이터에 가보고 싶다고. 바로 집 앞인데 슬쩍 다녀오자고. 그렇게 몰래 나간 놀이터에서 ♬~미끄럼 타고 그으네도~ ♬ 탔지만 기대와 너무 달랐다. 누나는 뛰지 말라며 조심하라는 말을 반복했다. 넘어지면 옷을 버리잖아. 다치면 안 돼! 결국 흥미가 없어져서 돌아왔다. 하지만 왠지 미련이 남았다. 그 이후에도 아이들의 소리는 나를 자극했다. 대체 쟤들은 뭐가 그리 재미있어서 저렇게 웃는 걸까?
겨울이 되자 놀이터의 소리가 줄어들었다. 날이 춥다 보니 집안에서 노는 아이들이 많아진 것 같았다. 어느 밤. 2층 창문에서 우연히 놀이터에 시선이 갔다. 한 밤중인데 서너 명이 뛰어다니며 놀고 있었다. 아이들은 동네가 떠날 정도로 큰 소리를 냈다. 부러웠다. 마치 홀린 것처럼 창문으로 다가갔다. 정신없이 바라보느라 입김이 창에 김을 서리게 하는지도 몰랐다. 점점 창문이 뿌옇게 변했다. 창에 손가락을 댔다. 이 손가락은 나의 분신이었다. 아이들을 따라 놀이터를 달렸고, 그네를 타기도 했다. 누군지도 모르는 아이들과 어울려서 나의 손가락은 놀이터를 신나게 누비고 다녔다. 누나와 갔던 놀이터는 가짜였다. 나에게는 창문에 비친 이 놀이터가 진짜였다. 그때부터 유리창에 손가락을 대고 노는 버릇이 생겼다. 방송국을 가는 차 안에서도 창 유리에 손가락을 댔다. 이제부터 이 손가락은 자동차의 속도로 달리는 슈퍼 히어로다. 건물 위를 뛰어다니기도 하고 한강 위를 날아다니기도 한다. 손가락과 상상력만 있으면 뭐든 할 수 있었다. 나처럼 바쁘거나 몸이 아파서 뛰어놀 수 없는 아이들에게 이 멋진 놀이를 알려주고 싶었다.
주산 학원 1층에는 오락실이라는 수상한 장소가 있었다. 학원에 내려줄 때마다 어머니는 절대 가면 안 되는 무서운 곳이라고 했지만, 내심 궁금했다. 이럴 때 유일하게 내 편을 들어줄 사람이 한 명 있지. 가정부 누나를 꼬셨다. 생일 선물 대신 오락실에 데리고 가 달라고. 어른인 누나와 함께 라면 괜찮겠지? 수 없이 시전 한 떼쓰기 스킬로 결국 누나는 항복했다. 그렇게 생일날. 누나와 함께 오락실에 들어섰다. 세상에. 내가 상상한 손가락 놀이를 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니. 다만 유리창에 손가락을 대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탕 같은 막대를 기울이면서 화면을 보고 있었다. 그 안에는 너구리도 있었고 비행기도 있었다. 이런 멋진 세상이 있단 말이야? 내 인생 첫 게임은 건담이었다. 역시 오타쿠가 될 운명이었나 보다.
한번 다녀온 뒤로 오락실이 계속 아른거렸다. 결국 큰 결심을 했다. 동생과 둘이서 몰래 다녀오기로 한 것이다. 그 멋진 세상을 동생에게도 알려주고 싶었다. 우리 둘은 오락실에 들어섰다. 어른 없이 가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딱히 막는 사람은 없었다. 동생에게 100원짜리를 몇 개 쥐어 주고 게임을 시작했다. 너구리였다. 한판하고 돌아보니 동생이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지? 오락실을 뛰쳐나와 일단 집으로 달렸다. 가정부 누나에게 알려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집이 가까워지며 놀이터의 아이들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대문 앞에 동생이 있었다. 눈물이 가득했다. 오락실에서 어떤 형들에게 돈을 빼앗겼다고 했다. 충격이었다. 이래서 어머니가 가지 말라고 하셨구나.
그 뒤로 계속 곱씹었다. 오락실에 다시 가고 싶었지만, 무섭기도 했다. 어른들이 자기들만의 성역이라고 정해버린 느낌이었다. 너희 같이 어린애들이 또 오려고? 돈을 다 빼앗아 버릴 테다! 너희는 유리창에 대고 가짜 손가락 게임이나 해! 나쁜 어른들 같으니.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아이들 소리, 처음으로 오락실을 마주한 충격, 동생의 우는 얼굴. 그 과정에서 결심했다. 내가 저걸 만들 거야. 어른들만 하는 건 나빠! 내가 만들면 아이들만 하게 해 줄 거야! 그렇게 하면 나처럼 바쁜 아이들도, 놀고 싶지만 몸이 아픈 아이들도, 누구나 즐거울 수 있을 거야.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주말. 아버지가 갑자기 외출하자고 했다. 함께 간 곳은 전자 매장이었다. 그곳에서 사 온 네모난 상자를 텔레비전에 연결했다. 오 마이 갓. 우리 집 텔레비전이 오락실이 되었다. 아버지는 이 순간, 아들의 꿈을 밀어주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단순히 피곤한 주말 외출을 줄이고 싶으셨던 걸까? 아니면 동생이 험한 일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신 걸까? 어느 쪽이든 이날 아버지가 구매하신 게임기. 재믹스로 인해 나의 미래가 확정되었다. 반발 심으로 정했던 어렴풋한 꿈은 이제 구체성을 띄게 되었다. 뭐야, 집에서도 할 수 있잖아?! 나는 이 것을 만드는 사람이 될 거야! 반드시!
***
“설마. 끝인가요? 전혀 설명이 안 되는데요? 마이즈 씨가 게임에 집착하는 이유가 단지 이것뿐? 그럴 리가 없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