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뒤면 제 생일이에요. 남편은 갖고 싶은 게 뭐가 있냐고, 생각해 보라고 계속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미 10월 첫날부터 생각해 보았지만 갖고 싶은 게 정말 없어요. 음, 굳이 말하자면 형식보다 내용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거든요. 이게 적절한 비유일지는 모르겠지만요. 쉽게 말하자면 뭐든 물건 본연의 역할만 할 수 있다면 굳이 가격은 중요하지 않아요. 이미 제가 가진 물건들은 본연의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더 값비싸고 좋아 보인다는 이유로 사고 싶지는 않다는 거예요(물론 취향도 어느 정도는 반영하기는 합니다) .
그런 제가 욕심을 내는 물건을 발견했어요! 어제 교보문고에 갔는데 세상에나 벌써 2026년 다이어리가 진열대에 올라와 있는 거예요. 어차피 살 거였고 내지 구성이 마음에 쏙 드는 것이 있어서 그건 샀고요, 그 옆에 예쁜 가죽 공책들에도 눈이 갔어요. 공부할 때 필요한 새 공책이 필요해서 교보문고에 간 거였거든요. 그래서 이걸 사야지, 하고 집어 들고 가격표를 봤는데, 17,000원이나 하는 거예요. 금칠을 했나? 도둑질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얼른 공책을 다시 내려놨어요. 그러고 나서 적당한 크기와 무게의 요란하지 않은 디자인의 공책을 마치 면접관처럼 신중히 검토했죠.
결국 A5 크기의 120장짜리, 빨간 표지의 공책을 샀어요. 꽤나 괜찮다고 생각하고 서점을 나왔죠. 그런데 기분이 그리 홀가분하지는 않았어요. 왜지, 왜일까, 생각하다가 버스에 올라 자리에 앉자마자 답이 떠오르더라고요. 아. 나는 공책에 욕심을 내는구나.
생각해 보니 어렸을 때부터 공책을 고르는 데 유독 신중했던 것 같아요. 고향집에 내려가서 보면 지금 봐도 꽤나 있어 보이는 공책에 제가 일기를 써놓은 것들이 여기저기서 발견돼요. 그냥 예쁜 게 좋은 거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다른 물건에는 그렇지 않잖아요. 생각해 보니 저는 좋은 종이에 글을 쓰면 제 글이 귀한 대접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거더라고요. 내 글은 귀하니까 아무 데나 쓸 수 없어, 하고요. 글 자체가 좋은 글이면 그게 설령 찢긴 종이에 써도 가치가 있는 것일 수 있죠. 그런데 이게 제 글에 대한 자존감을 챙기는 방법인 것 같아요.
좋지 않나요? 글로써 제 자존감을 유지하고, 그 글을 좋은 공책으로써 귀하게 대해 주는 것. 아마 이게 다음에 제게 줄 선물이 아닐까 싶어요. 한 번도 펼친 적 없는 귀한 가죽 커버 양장 노트를 쫙 펼쳐서 가운데를 손바닥으로 꾹꾹 누른 다음에 무슨 글을 써볼까요. 아마 저는 한참을 어떤 귀한 말로 이 공책의 처음을 시작할까 생각하겠죠. 그러고 만면에 미소를 띠고 시작할 거예요. 뭐라고 쓸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