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 나비 33화
“딱 타이밍이 맞았던 거지. 그래도 안심해. 대화 소리는 못 들었어.”
밤이 깊어지도록 인화가 집에도 안 들어오고 전화도 안 받기에 인혁이 인화를 찾으려 나간 순간과 내가 인화를 데려다주는 시간이 타이밍 좋게 겹쳤던 모양이었다.
“아주 그냥 얼굴 새빨개진 채로 집에 들어와가지고-”
“시끄러워!”
목소리를 높인 인화가 인혁의 말을 단칼에 잘라내었다. 문득 진우를 슬쩍 바라보았다. 뭐가 그렇게 찔리는지 흔들리는 눈동자로 삐질삐질 땀을 흘렸다.
“당시 네 얼굴은 보지도 못했어. 이도헌 얼굴도 잘 안 보였고. 그냥 대충 실루엣만 보인 거야.”
“그러니까 왜 엿봐!”
“그럼 네가 집에 빨리 들어와서 걱정 끼치지를 말던가!”
인혁과 인화의 끊임없는 투닥거림 속 뻘쭘하게 웃은 채 내 눈치를 보는 진우에게 넌지시 말을 걸었다.
“난 적나라하게 다 봤는데, 그렇지?”
“……크흠.”
진우는 헛기침을 한 뒤 내 눈을 슬쩍 피했다. 그때였다.
“여어, 도련님들~! 아가씨~!”
저벅저벅, 발걸음 소리와 함께 원우 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형!!”
“이게 얼마 만입니까~”
반갑게 인사하는 인혁의 머리를 형이 거칠게 쓰다듬었다.
“어디 가는 길이세요?”
“커피 심부름이요. 가위바위보 졌습니다.”
진우가 내기에서 진 사실을 상기시키자 한껏 암울해진 형의 손에 커피가 가득 들려 있었다.
“그때 가위를 냈어야 됐다니까요? 진짜, 내가 가위만 냈어도 박이신이 가는 건데…….”
말끝이 흐려지는 형의 투덜거림은 잊고 있던 무언가가 떠오른 듯한 표정과 함께 사라졌다.
“아, 맞다. 도헌 도련님.”
형이 내게로 시선을 옮기며 말을 덧붙였다.
“실장님한테 부탁하신 서류 지금 비서실에 있습니다. 도련님 만날 줄 알았으면 제가 들고 오는 건데.”
“벌써 준비가 다 됐어요?”
새벽에 업무를 보던 중 커피를 사려 잠시 사회로 나가려던 때에 마침 아버지의 비서이자 비서실의 실장이신 임태윤 형을 만나버렸다. 철야를 한다는 사실을 들키고 한바탕 잔소리 폭탄을 맞은 뒤 형에게 협회 경찰 측에서 받아온 불법 속성 사용자 서류들의 연도와 같은 연도 때 처리된 불법 속성 사용자 처벌자 목록 정리를 부탁드렸다. 정확한 확인을 위해서 그 서류가 꼭 필요했다.
처음에는 내가 정리해서 비교하려고 서류만 부탁드렸는데 정리까지 해주겠다 해서 계속 사양하다가 결국 태윤 형이 이겨 정리까지 맡아주었다. 그게 새벽 때의 일인데…… 벌써 끝났다고?
“네, 그렇다 하더라고요. 근데 지금 실장님이 이 대표님이랑 백화점 가셔서 말입니다.”
또 JI 백화점 기습 방문하시는 건가.
“제가 지금 가지러 가겠습니다.”
그 말에 원우 형의 표정이 갑작스레 활기가 돌았다.
“그럼 지금 비서실 오시는 겁니까?”
형의 환한 미소가 왜 이리도 불안한 걸까.
“그렇죠……?”
갑작스레 급격히 심각해진 표정으로 형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루루루, 연이은 통화음이 툭 끊기며 누군가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뭐 하냐, 빨리 안 오-”
“비상!!”
목소리를 들어보니 아마도 물 속성 대표님의 비서님이신 김윤오 형에게 전화를 건 것 같다.
“아 시끄러워! 커피나 빨리 들고 와!”
“도헌 도련님 비서실 기습 방문!”
“…….”
잠시 일은 정적 속에는 나의 곤란함을 담은 한숨만이 맴돌았다.
“비사앙!!”
이번에 소리를 친 건 핸드폰 너머 윤오 형이었다.
“형, 제발…….”
내 목소리는 안 들리는 건지 곧장 엘리베이터를 향해 달려가는 형을 뒤따라 빠르게 쫓아갔다.
“이번에도 기습 방문입니까?”
“네. 실장님도 백화점으로 출발하기 직전에 알았다고 합니다.”
엄마가 맡고 계시는 JI 병원과 최 소장님이 맡고 계시는 JI 연구소와 달리 JI 그룹 소속인 JI 백화점은 회사의 대표이신 아버지가 통괄하고 계시다. 따로 백화점을 맡는 분이 없는 만큼 더욱 엄격히 관리하기 위해 아무런 연락 없이 자주 기습 방문을 하곤 하신다.
문제는 백화점 직원들이 몹시도 질색한다는 거지. 아마 아버지는 그 사실을 모르고 계실 것이다.
비서실이 있는 층에 도착했음을 알리며 엘리베이터가 문을 열었다. 형과 함께 비서실 앞으로 가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다시 닫고 싶은 기분이 들게 만드는 것도 과연 재주일까.
“어서 오십시오, 도련님.”
살짝 고개를 숙인 채 일렬로 쭉 서 있는 형들과 누나들, 그리고 대체 왜 있는 건지 존재의 이유를 알 수 없는 레드 카펫.
아, 진짜…….
“뭐야 나도 할래!”
내 옆에 있던 원우 형이 한껏 신이 난 채 후다닥 달려가서 맨 끝에 서서 저 짓에 합류했다.
……집 가고 싶다. 아니, 본부라도 좋아. 그냥…… 당장 여기서 나가고 싶다.
“……도대체, 다들 왜 이러시는 겁니까.”
“그야 당연히 재밌, 아니 도련님이 오신다는데 이 정도는 당연히 해드려야죠.”
왼쪽 선두에 서서 뿌듯하게 웃고 있던 물 속성 대표님의 비서님, 김윤오 형이 내게 말했다. 왼쪽에 세 분, 오른쪽에 두 분이 서 있었다.
왼쪽에는 차례대로,
최 소장님의 비서님, 박이신 형.
엄마의 비서님, 최연지 누나.
박 협회장님의 비서님, 권원우 형.
오른쪽에는 차례대로,
얼음 속성의 대표이신 천 팀장님의 비서님, 배예림 누나.
물 속성의 대표이신 김 선생님의 비서님, 김윤오 형.
“잠시 서류만…… 가지러 온 거라고요…….”
나는 이마를 짚고는 넌지시 말하였다. 그러자 웃음이 섞인 장난스러운 목소리를 연지 누나가 꺼내 보였다.
“그럼 여기 지나가시면 되죠. 혹시 뭐 문제가 될 만한 거라도 있는 건가요?”
많죠, 그것도 엄청.
저번에 당한 적 있다. 그때도 비서실에 왔을 때 어김없이 레드 카펫이 깔려 있었고 지금과 똑같이 형들과 누나들이 일렬로 서 있었다.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그냥 레드 카펫을 밟고 지나가던 순간에 박수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그 뒤로는 멋지다, 귀엽다, 섹시하다, 같은 낯부끄러운 말들이 오고 갔다.
진짜 창피해 죽는 줄 알았는데, 이번에도 안 그럴 거라는 보장이 없다. 이 형, 누나들은 할 거면 더 하지 덜 할 인간들이 아니란 말이다.
미치겠네 진짜.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꼼작 못하고 있을 때 다시 한번 비서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도헌 도련님?”
절로 돌아간 고개와 함께 반가운 얼굴이 시선에 안착하였다.
“유진이 형.”
사부의 비서이신 고유진 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