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 나비 34화
아무래도 사부와 보낸 시간이 대다수였기에 자연스레 비서님들 중에서도 유진이 형과 유독 많이 친해졌다. 사부가 믿고 의지하는 분이어서 그런가 나도 모르게 비서 형, 누나들과 있으면 유진 형에게 가까이 기대고 있었다.
“같은 건물에서 일하는데 너무 오랜만에 보네요. 잘 지내셨습니까?”
“네.”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형이 부드럽게 웃어주었다.
“근데…… 우리 비서님들은 뭘 하고 계시는 겁니까? 이 레드 카펫은 또 왜 꺼내 논 거고.”
“아 진짜 고유진 비서님 눈치 없으십니다. 한창 재밌을 때였는데.”
쳇, 짧게 내뱉으며 이신 형이 말했다.
“도헌 도련님, 누가 도련님 못살게 괴롭혔습니까? 다 이르세요. 제가 따끔히 혼내겠습니다.”
유진 형은 내 어깨를 살포시 잡은 채 앞에 있는 형, 누나들을 노려보았다. 나는 형을 따라 형, 누나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다요.”
“아! 너무합니다!”
“도헌 도련님은 원우만 좋아해.”
“슬퍼. 울어버릴 거야.”
“제가 도련님 어릴 때 도련님 제일 잘 놀아줬는데!”
끊임없이 이어지는 형, 누나들의 칭얼거림에 원우 형이 나를 뒤에서 꼭 안았다.
형의 품은 너무도 차가웠다. 분명 따스했던 것 같은데, 어느샌가 온기를 잃은 채 서늘히 식어갔다.
이랬던 게 언제부터였더라.
“도헌 도련님 내 거야.”
그래, 사부가 사라진 뒤로.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분이 없는 상황에서 다른 이의 따스한 품이 지독하도록 역할뿐이니.
형의 행동을 가만히 보던 예림 누나가 자신의 턱을 매만졌다.
“역시, 도헌 도련님의 사랑을 얻으려면 고유진을 없애는 방법밖에 없나.”
……잘못 들은 건가. 꽤나 진지했던 목소리에 불안함을 담은 채 예림 누나를 빤히 바라보자 누나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진심입니다.”
곧이어 옆에 있던 형, 누나들이 유진 형을 보며 수군거렸다.
“연장?”
“뭔가 좀 더 확실하게 처리할 수 있는 거 없나.”
“최 소장님 시약 몇 개 훔쳐서 섞어볼까?”
“누가 할 건데?”
“당연히 김윤오가 해야지.”
“예?”
“근데 그러다 폭발해서 우리가 먼저 죽는 거 아니야?”
무서운 사람들…….
나는 내 어깨를 감싸고 있는 유진 형의 팔을 더욱 끌어안았다. 그러자 형, 누나들의 몸이 잠시 굳더니 천천히 내게로 다가왔다. 당황하며 눈동자를 급히 굴리고 있던 도중에도 형, 누나들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어떡하지?”
형, 누나들은 나를 감싸고 둘러싸 바로 앞에서 멈추었다. 심각한 표정을 입은 연지 누나가 말을 덧붙였다.
“심각하게 귀여운데.”
뭐……, 뭐? 뭐가 어떻다고……?
“귀여워.”
“응, 귀여워.”
“안 되겠다. 진짜 납치해서 이제부터라도 내가 키워야겠다.”
안절부절못한 채 이리저리 시선을 계속 옮겨 다녔다. 얼마 안 가 뒤에서 들려오는 짧은 웃음소리와 함께 유진 형이 팔로 나를 감싸 안으며 걸음을 옆으로 이끌었다.
“그보다 비서실에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적나라하게 느껴지는 애절한 눈빛들을 튕겨내고 같이 걸음을 옮기며 유진 형이 내게 물었다.
“태윤이 형한테 서류 하나 작성 부탁드린 게 끝났다고 해서 가지러 왔어요.”
“아하, 그거 도련님 거였구나. 실장님 자리에 있습니다. 가시죠.”
저벅저벅, 무게를 버리지 못한 두 발걸음 소리가 이리저리 섞여 들어갔다.
비서 형, 누나들은 모두 중학생 때부터 친구 사이라 하였다. 태윤 형과 유진 형은 서른세 살, 연지 누나와 윤오 형은 서른두 살, 예림 누나와 이신 형과 원우 형은 서른한 살으로 친한 선후배 사이였으나 함께 지난 세월이 많아지며 자연스레 말을 놓고 호칭을 편하게 하여 둘도 없는 절친한 친구 사이가 되었다고 한다. 물론 불과 알고 지낸 지 일 년도 채 안 지나 이미 말을 놓고 반말을 하며 친구처럼 서로 이름을 불렀다 하긴 하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비서님이라던가 실장님이라 부르며 존댓말을 쓰긴 하나 형, 누나들끼리 있을 때는 편하게 말하고 있을 것이다.
저렇게.
“아하학! 아학!! 최연지 진짜 바보 아니냐 하하하학!”
“아무래도 네 명줄은 태생적으로 짧은가 보다. 맞을 짓을 골라서 하는 걸 보니까, 망할 박이신 놈아.”
“아! 아악! 아파, 아프다고!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연지야, 최연지, 아, 누님!”
“아하하학!! 박이신 저 멍청이!”
“아유, 꼴좋다.”
“저거 내가 까불 때 알아봤다.”
시끄럽게 들려오는 형, 누나들의 대화 소리에 유진 형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여기 있습니다.”
꽤나 상당한 두께의 서류가 서류봉투에 담겨져 있었다. 이걸 몇 시간 만에 다 했다고? 천천히 해도 되는데. 하여튼, 태윤 형도 진짜 일 중독이라니까.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특경부 일 때문에 많이 바쁘죠?”
넌지시 묻는 유진 형의 질문에 나는 형의 눈동자를 지그시 응시하였다.
이제야 똑바로 집중할 수 있게 된 형의 두 눈동자에 박혀 있던 빛은 이미 저버린 지 오래였다. 죽어 나간 빛의 시체가 존명의 의의조차 잊은 채 차분히 가라앉았다.
빛을 품게 된 원인과 부서진 원인이 같은 분이니 감히 누구를 원망해야 하는가. 길을 잃은 여한의 종착은 언제나 스스로임을 내가 어떻게 잊을 수 있나.
“형만 하겠어요.”
“제가 이제 뭐가 바쁘겠습니까. 그냥 잡일만 하고 있는데.”
아무렇지 않은 듯 올린 형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려 왔다.
“태윤이 형이 형한테 많이 고마워해요. 형 덕분에 태윤이 형 일이 줄어들었다고요.”
사부의 업무는 모두 박 협회장님에게로 넘어갔다. 미팅을 나간다던가 회의에 참석한다던가 하는 집무실을 벗어나는 일은 사부가 있을 때도 두 분 모두 같이 움직이셨기에 박 협회장님의 서류 처리와 같은 일이 늘어났을 뿐이어서 특별히 박 협회장님의 비서이신 원우 형의 일이 늘어나는 것도 아니었다. 속성 대표님들 모두 비서님들의 업무를 덜어드리려고 몇 가지의 업무는 홀로 보시는 편이시니까.
즉, 유진 형의 업무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뜻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차마 유진 형을 해고할 수 없으셨던 아버지에게 태윤 형이 한 가지 제안을 했다. 태윤 형의 일부 업무를 유진 형에게 맡기자고 말이다.
그 외에도 유진 형은 다른 속성 대표님들의 일정에 맞추어 몇몇 개의 일을 보고 있었다.
“……태윤이가 그럽니까?”
쓸쓸함을 놓지 못하는 미소를 어렵사리 짓는 유진 형을 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짐이 되지 않아서 다행이군요. ……한 협회장님께서 자리를 비우신 마당에 해고를 당해도 전 할 말이 없는 상황인데…….”
우리는 언제쯤 그분의 이름을 마음 편히 부를 수 있을까.
그분의 이야기를 언제쯤 웃으며 말할 수 있을까.
그분 생각에 가슴 아파하는 일이 사라지는 순간이 우리에게 약속되어 있기는 한 걸까.
정확한 사연은 모르지만 유진 형에게 사부는 그냥 직장 상사가 아니었다. 두 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하나 형에게 사부가 지극히 소중한 존재였다는 것, 그것만은 확실했다.
“……하하, 제가 괜히 분위기를 망쳤네요. 안 그래도 바쁘신 도련님 시간도 뺐고. 어서 가보세요.”
내가 한 협회장님이나 사부라는 명칭을 입에 담으면 내게 깊은 감정의 파도가 들이닥치는 것처럼 형도 한 협회장님이라는 이름을 꺼내기 힘들겠지.
“네, 수고하세요.”
“도련님도요.”
그렇게 자주 부르던 사부를 이제는 마음 편히 부를 수 없게 되었다.
“도련님 이제 가세요?”
형, 누나들이 모여있는 시끌벅적하던 한 곳에서 예림 누나가 이쪽으로 걸어오며 입을 열었다.
“네.”
“아 하세요.”
“네? 무슨-, 으븝?”
갑작스레 심어진 의문이 싹을 틔우기도 전에 입에 무언가 들어왔다.
“홍삼입니다. 드세요~”
그러고는 누나는 더 이상의 그 어떠한 말도 없이 곧바로 몸을 돌려 다시 형, 누나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걸음을 돌렸다. 당혹을 숨기지 못한 채 형을 바라보자 형이 내 입에 물려있는 홍삼 스틱을 슬쩍 일별하였다.
“김 원장님이 저희 먹으라고 보내주신 겁니다. 몸에 좋은 거니까 드세요.”
나는 홍삼 스틱을 한 번 쪽 빨았다. 쓴맛이 입안 가득 채워졌다.
“그럼 저 가볼게요.”
“네, 들어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