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 나비 36화
웅, 머릿속에 기나긴 소음이 울려 퍼졌다. 머리가 충격을 받았다던가 건강에 이상이 있어서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는 것은 단번에 알아채었다. 그래도 모두가 찾는 병원 원장님의 딸로 나름 의학 지식에 있어 자부할 수 있으니까. 내 몸 상태는 내가 제일 잘 알았다. 물론…… 육체적 건강만이지만.
지금 이게 무슨 느낌인지 알 수 없었다.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도 파악되지 않았다.
뭔가, 울렁거리고 금방이라도 눈물 날 듯 아리면서 멍해지는 느낌…….
“누나?”
“아, 고마워.”
나는 급히 커피를 받으며 이해할 수 없는 기분을 떨쳐내려 입을 열었다.
“네가 타주는 커피 진짜 맛있는데.”
“나도 타주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시무룩해하는 진우를 보고 몇 번 웃어 보인 채 커피를 한번 마시고는 다시금 말을 이었다.
“……너 원래 나 캔 못 따는 거 알고 있었어?”
“응? 갑자기?”
“아니, 그냥…… 응, 갑자기 문득.”
무심결에 나온 말에 나조차 의문을 품게 되었다.
“당연한 거 아니야?”
또다시 머리를 멍하게 만드는 진우의 웃음에 휘말리는 것 같았다.
“누나 캔은 항상 내가 따줬거든요~”
그랬었나?
단 한 번의 의식이 이렇게나 무서웠던가. 그냥, 그래 의식이다. 그동안 고마움이 가미된 자그마한 인식 현상. 복잡하게 뒤엉킨 채 뜨거워진 마음을 애써 식히려면 이렇게밖에 결론을 낼 수 없었다.
“일이 많으면 우리한테 좀 맡기지. 이도헌은 좀 다른 사람한테 기댈 수도 있어야 하는데.”
저절로 나오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캔을 만지작거리며 목소리를 꺼냈다. 겉면에 붙어있던 차가운 물방울이 손을 적셨다.
“그러게 말이야. 맨날 자기 혼자만 엄청 바쁘고, 힘든 일이 있어도 속에만 담아두고, 우리한테 기댄 적이 한 번도 없으니까. 애초에 남한테 잘 기대지 않잖아.”
아무리 캔을 매만져도 한 번 달아오른 열기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
“아빠를 닮아서 원래 잘 안 웃긴 하지만, 한 협회장님이 사라지시고 나서 더 안 웃는 것 같아. 그렇다고 울지도 않고. 감정을 계속 억제하고 있는 느낌이랄까. 이해는 하다만 계속 참으면 안 좋을 텐데.”
“잠도 못 자는 것 같더라.”
요새 도헌이 평소보다 많이 지쳐 보였다. 하긴, 그렇게 죽어라 일만 하는데 안 힘들 리가.
물론 겉으로는 절대 드러내지 않는다. 아빠를 지독하게도 닮았으니 말이다. 간혹 보여주는 그 공허한 모습이 심히도 쓸쓸해 보였다.
들고 있는 짐들을 우리에게 나눠주면 좋으려만, 아마 절대 그러지 않을 테지. 자기 사람은 누구보다 잘 챙기면서 정작 자신을 돌보지 못하는 바보 같은 애니까.
아니면, 혹시…….
“……우리가 못 미더운 걸까?”
순식간에 불어난 의혹에 무의식적으로 말이 튀어나왔다.
“그럴 리가. 만약 그랬다면 걔 특경부도 안 한다 했을걸? 차라리 자기 혼자 한 협회장님 찾는다고 난리 쳤겠지.”
평소라면 인지조차 안 했을 불안이 표해졌다. 그런데, 네 말에는 대체 어떤 힘이 깃들어 있는 건지 그 불안을 단숨에 제압하였다.
“하하, 맞아. 그랬겠지.”
진우와 눈을 맞춘 채 웃음을 섞어가며 한 마디 내뱉자 이내 곪아있던 그늘까지 전부 소멸되었다.
“그나저나 팔은 좀 괜찮아? 심하게 다쳤었잖아.”
나는 진우의 왼쪽 팔을 보며 말했다. 진우는 상처 부위를 감싸 살짝 문질렀다.
“많이 나아졌어.”
“불편한 건 없고?”
“딱히 없는 것 같은데……. 아, 붕대 좀 바꿔줘. 혼자 하는 건 힘들더라고.”
“지금 해줄게. 붕대는 어딨어?”
어릴 때부터 엄마의 곁에서 몇 가지의 여러 치료법을 배워 간단한 응급처치 정도야 능숙하게 할 수 있었다. 엄마처럼 되고 싶어서였다. 그 어떤 병이든 능수능란하게 치료하시는 엄마를 한없이 동경하고 존경했다. 마냥 해 속성에 의지하지 않는 엄마의 모습을 따라 해보려고도 했으나 도저히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었다.
해 속성까지 사용할 수 있으면 더 많은 치료도 가능할 텐데.
“아마 이도헌 방 두 번째 책장 맨 위에 구급상자 있을 거야. 거기에 들어있어.”
“내가 꺼내 올게. 앉아 있어.”
“누나 키 안 닿을 텐데~ 괜찮겠어?”
진우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 정도로 키가 작진 않거든.”
진우를 노려보고는 나는 도헌의 방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가 불을 켜니 잘 정리된 책상과 침대, 오와 열을 맞춰 꽂혀 있는 책장 속 책들, 각이 명확히 형성된 방의 모든 곳에서 그의 성격을 엿볼 수 있었다. 흐트러짐이라고는 하나도 찾을 수 없고 자그마한 먼지조차 존재하지 않은 방이었다.
꼭 아빠 서재 보는 거 같네. 내 동생이라지만 참 깐깐하단 말이지.
“두 번째 책장 맨 위…….”
고개를 들어 책장을 살펴보니 진우의 말대로 두 번째 책장 맨 위 칸에 구급상자가 있었다. 문제는.
“근데, 저거 어떻게 꺼내지.”
대충 봐도 손이 안 닿을 것 같았다. 구급상자를 꺼내려 까치발을 들고 최선을 다해 손을 뻗어보았지만 역시 무리였다. 아무리 손을 뻗고 제자리에서 뛰어 봐도 구급상자에 닿지 못했다.
그때, 내 위에 갑자기 그림자가 드리우더니 불쑥 튀어나온 누군가의 손이 구급상자로 향했다.
“거봐, 내가 안 된다고 했지?”
급히 뒤를 돌아보니 바로 앞에 진우가 서 있었다. 그것도 거리가 엄청 가까운 채로. 안절부절못하며 어버버 거리고 있을 동안 어느새 진우는 손쉽게 구급상자를 꺼내 나에게 건넸다.
원래…… 키가 이렇게 컸었나? 손은 또 왜 이렇게 크고…….
아니 갑자기 왜 이래, 이선아. 새삼스럽게. 그래, 원래 그랬던 거야. 그냥 항상 봐서 몰랐던 거지 서진우는 원래 이랬어.
나는 헛기침을 몇 번 하며 정신을 차리려 작게 고개를 내젓고 진우가 건네는 구급상자를 받아서 옆으로 빠져나왔다. 책상 위에 올려둔 구급상자를 열어 붕대를 꺼내 진우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갑작스레 시야로 들어온 모습에 온몸이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