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막 물망초(10)

불의 나비 48화

by 매화연

“혹시 옛날에 트라우마로 남을 만한 일이 있었나요?”


최대한 조심스럽게,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환자가 불쾌한 순간 약사 자격 박탈이니.


세연 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곧장 미간이라도 찌푸려질 줄 알았는데 되려 태연하기를 넘어서 편안해 보였다.


“불편하시면 억지로 이야기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오늘이 힘들면 내일, 내일이 힘들면 모레, 일주일이 흐르든 일 년이 흐르든 천천히, 세연 씨가 말하고 싶을 때 마음 편히 해주세요. 저는 항상 약국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음, 아무리 그래도 저 말은 좀 무리수였나. 괜히 너무 지나치게 부담을 준 건 아니겠지. 부풀어 나는 걱정을 부드럽게 지은 미소 뒤로 넣어두며 세연 씨가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렸다.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셨어요. 중학생 때.”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그저 잠시 생각에 빠져있던 세연 씨가 나의 예상을 완전히 뒤엎으며 아무렇지 않게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여름 방학식 날, 다 같이 여행을 가던 길에 교통사고가 났거든요. 불행히도 저만 살았지만…….”


쓸쓸한 웃음이 동반된 세연 씨의 목소리에서 죄책감이 묻어 나왔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은 그 어떤 말로도 치유되지 않는다. 내 탓이 아니어도 내 잘못이 되고, 의연히 자책이 일상이 되는 것이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니.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던가, 죄책감을 갖지 않아도 된다라던가, 그런 사소한 위로로 사라지지 않을 비애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나는 그녀에게 그 어떤 말도 건넬 수 없었다.


“그 때문인가. 그건 잘 모르겠는데 잠을 잘 못 자겠더라고요. 처음에는 아무 증상 없이 그냥 잠만 안 와서 단순히 불면증이겠거니 넘겠는데 어느 날 이명이 들리더니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다른 증상들도 동원됐어요. 어떤 방법을 써도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어서 수면제를 먹기 시작했는데 뭐, 특별한 효과는 없었어요. 그냥 한 십 분 선잠을 자는 정도.”


심각한 일이 아니라는 듯 웃음을 유지하며 세연 씨가 말했다.


트라우마……인 건가. 나 참, 뭔가 익숙하다 했더니 내가 겪었던 증상이었잖아.


“하하, 너무 어두운 이야기였죠? 죄송해요. 저 때문에 갑자기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졌네요.”


세연 씨의 미소에 가슴을 쿡쿡 찔렸다. 이 동정과 연민은 세연 씨를 향한 것일까, 아니면 그녀에게서 겹쳐 보이는 나를 향한 것일까.


습관성 자책과 분위기 전환, 억지로 지어 보이는 웃음까지. 평소에 어떤 말을 듣고 자라왔는지 한눈에 엿볼 수 있었다. 뻔하지. 존재하지도 않은 힘을 만들어내라 하고, 흘러나오는 눈물을 멎으라 하고, 떠나간 이들이 보면 슬퍼한다며 이유조차 없는 삶을 이어나가라 외쳤을 것이다.


힘내라느니 울지 말라느니 하늘에서 부모님이 보면 슬퍼하실 테니 웃으며 살라느니 웃기지도 않는 말들을 멋대로 늘어놓는 주위 사람들 덕분에 삶이 더 싫어졌거든. 내가 원하는 건 그런 자질구레한 말들이 아니라 내 곁을 떠나간 그분들인데. 다신 볼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피어나는 마음을 저버리지 못하는 나한테 위로를 가장한 겉치레를 건네보았자 세상에 대한 원망을 감싼 연기만이 늘어날 뿐이다.


“아니에요. 사실 저도 중학생 때 부모님께서 세상을 떠나셨거든요.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치병 때문에. 그래서 약사가 된 거고요.”


세연 씨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세연 씨를 바라보았던 것처럼.


아무리 시간이 많이 흘렀고, 또 수도 없이 흐른다 한들 부모님의 이야기를 꺼내는 건 쉽지 않았다. 부모님이라는 세 글자를 입에 담는 것만 해도 감정이 울렁거렸으니까.


우리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안타까움을 담은 시선도 서로 전하지 않았다. 이해한다는 듯한 기류도 없었고, 공감한다는 듯한 공기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냥, 그저 침묵을 유지하였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났을까, 이번에는 세연 씨가 그랬던 것처럼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희 공통점이 맞네요. 나이도 같고.”


“아, 진짜요?”


세연 씨는 잠시 고민하였다. 곧이어 세연 씨가 소심하게 말을 건넸다.


“그럼 우리, 말 놓을까요……?”


그녀의 말에 놀란 나는 살짝 크게 뜬 눈을 연신 깜박이다 이내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좋아.”


나는 나의 이름을 알려주고 세연과 일상적인 가벼운 대화를 나누며 약을 처방해 세연에게 깔끔하게 포장된 약을 주었다.


“기존에 먹던 수면제 말고 여기 있는 하얀색 알약 먹으면 돼. 평소에 복용하고 있는 약보다는 덜 독하지만 자주 많이 먹는 건 몸에 안 좋아. 파란색 알약은 진통제야. 증상이 심하면 한 알 먹으면 되고 진통제 복용한 뒤 열 시간 동안은 절대 그 어떤 약도 먹으면 안 돼, 알았지?”


“응.”


“잘 알겠지만 가장 좋은 방법은 약에 의존하지 않고 극복해 보는 거야.”


내 말을 들은 세연이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잘 안다.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그렇다고 해서 약사로서 꼭 해야 하는 말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환자가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약사로서 뿐 아니라 친구로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나는 세연의 약 봉투에 내 전화번호를 적었다.


“그리고 이건 내 전화번호야. 만약에 잠이 안 온다면 약 먹기 전에 전화해. 내가 재워줄게.”


“어? 어떻게……?”


고개를 갸우뚱하는 세연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나 피아노를 칠 수 있거든. 전화하면 피아노 쳐줄게. 잔잔한 음악은 심박수를 낮춰주고 뇌파를 안정시켜 수면을 촉진하거든.”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에 스스로에게 놀랐다. 내 입에서 피아노 이야기가 나올 줄이야…….


“자, 그럼 두 번째 약속. 약 먹기 전에 꼭 먼저 나한테 전화해 줘.”


새끼손가락을 내미는 나를 보며 세연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야 좀 편안하게 웃네.


세연은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간단한 인사를 끝으로 세연이 약국을 떠났다.


부모님과 피아노 이야기가 떠난 약국의 고요. 분명 그 고요가 지극히도 쓸쓸하고 차가워 숨이 턱 막혀야 되는데, 전혀 그러지 않았다. 되려 따뜻하기까지 했다.


그녀가 남기고 간 활기가 약국을 한층 더 밝게 만들었다.


이전 17화제6막 물망초(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