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막 물망초(11)

불의 나비 49화

by 매화연

절정에 이르렀던 집중력이 결말로 추락하여 순식간에 흐려져 버리자 찌뿌둥함이 밀려왔다. 나는 간단히 기지개를 켜며 시계로 시선을 옮겼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나…….”


손님들의 약을 처방하고 여러 약과 병에 대해 정신없이 연구를 하다 보니 어느덧 시침이 가리키고 있는 시각은 새벽 두 시가 되어 있었다. 이왕 늦은 김에 그냥 약국에서 잘까 생각 중이던 그때, 핸드폰이 잔잔히 진동했다. 뒤집혀 있던 핸드폰을 돌려 확인하니 밝은 빛을 내는 화면에 ‘세연’이라는 두 글자가 나란히 띄워져 있었다.


“여보세요?”


가볍게 목을 가다듬고 전화를 받자 세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서준아. 나 정세연이야.”


“응, 세연아. 무슨 일이야?”


세연은 머뭇거리는 듯 잠시 침묵을 유지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아까 낮에 잠이 안 오면 약 먹기 전에 전화하라고 해서……. 미안, 아무리 그래도 내가 너무 늦은 시간에 전화했지?”


살짝 잠겨 있는 세연의 목소리가 내 귀를 간지럽혔다. 약사의 처방을 잘 들어주니 괜스레 기특하고 뿌듯하구만.


“아니야, 잘했어. 아직 약 안 먹었지?”


“응.”


“잠이 안 와?”


“응…….”


“다른 증상들이 나타나진 않았고?”


“살짝 어지럽고 두통이 약간 있기는 한데 괜찮아. 약 먹을 정도는 아니라서 진통제도 안 먹었어.”


세연에게 처방된 진통제는 효과는 확실하나 꽤나 독한 편이라 자주 복용하지 않는 편이 좋긴 하다. 세연의 상태는 본인이 가장 잘 알겠지만 많이 아픈데도 참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네.


“알겠어. 일단 잠시만.”


나는 전화를 스피커폰으로 바꾸고 차마 버리지 못해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구석 한 곳에 대충 놓아둔 피아노로 걸어갔다.


핸드폰을 잠시 옆에 놔두고 피아노 의자를 들어 안에 있는 먼지 쌓인 악보를 꺼내 악보대에 하나하나씩 펼쳤다.


삐뚤빼뚤하게 그려져 있는 악보 속 음표들, 어설픈 글씨체와는 달리 정확하게 맞는 코드와 음계, 그리고 푸르른 잔잔함을 담아 청량한 분위기가 잘 녹아든 선율까지.


어린 내가 직접 만든 자작곡이었다. 보기만 해도 가슴이 아려오는 빛바랜 악보에는 그날의 추억이 고스란히 녹아 스며들어 있었다.


“피아노 쳐주는 거야?”


핸드폰 너머로 전해지는 세연의 목소리가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응. 근데 마지막으로 친 게 십 년은 훌쩍 넘어서 진짜 많이 부족할 거야. 그러니까 기대는-”


“엄청 기대하고 있을게.”


……이야, 이거…… 부담감이 장난 아닌데.


“크흠, 엄청 오랜만에 치는 거라 실수할 수도 있어. 그래도 너그럽게 들어줘.”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조심스럽게 피아노 건반 위에 손을 올렸다.


더없이 어설픈 실력이었음에도 부모님은 어린 아들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음표 하나하나를 적어 나가며 손수 만든 곡의 연주를 들으시는 걸 좋아하셨다. 작곡가도, 연주가도 예쁜 우리 아들이라며 어찌나 좋아하셨던지. 여전히 과거의 기억만은 지극히 생생했다.


어쩌면 어릴 적의 나는 피아노 자체를 좋아했다기보다 나의 피아노 연주를 들으시며 즐거워하시는 부모님의 모습이 너무도 좋아 피아노를 계속 쳤던 걸지도 모르겠다. 피아노의 선율을 눈과 귀와 마음에 담으시고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시는 부모님의 얼굴을 보면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한없는 기쁨과 행복이 피어올랐다.


그랬기에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시고 나서 피아노에게도 작별을 고했지.


피아노 건반에 손을 다시금 얹히는 순간이면 그때의 부모님의 모습이 기억 속에 속속들이 박혀 어느덧 내 의지로도 슬픔을 주체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게 됐다.


붙잡고 싶지 않아도 어느샌가 잊혀야 될 기억에 가련한 미련을 뻗어 몹시도 간절히 붙들고 있는 비참한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과거 속 가장 강렬한 기억 중 하나가 바로 피아노였다. 피아노의 감각을 잊을 수 없었던 손이 한 음, 또 한 음, 천천히 연주를 이어갔다. 단 한 번의 실수도, 일탈하는 음이나 틀리는 박자도 없이. 심지어는 나도 모르게 어색하거나 아쉬운 부분을 즉석에서 편곡하고 있었다.


미, 그다음은 도. 3도 화음 잘 살리고, 쉼표 주의하면서 부드럽게 G 코드.


문득 어린아이의 온기와 같은 따스함이 느껴졌다. 슬며시 고개를 돌리니 내 옆에는 지금을 잃어버리고만 환한 웃음을 지으며 진심을 담아 즐겁게 나와 같이 연주를 하고 있는 어린 시절의 내가 앉아 있었다. 나의 미련과 그리움이 섞여 만든 환영임을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순수한 아이의 모습에 나직하게 내뱉어지는 숨과 함께 주저 없이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더없이 만족스러운 연주를 마친 나는 잠시 악보를 가만히 보다가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왜일까.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피아노를 향해 조금의 눈길도 주지 않았던 내가, 피아노를 두려워하던 내가, 알고 지낸 지 하루도 채 안 지난 사람에게 피아노를 쳐주고 있었다.


“우와……, 앗.”


무심코 나온 감탄이었는지 세연이 살짝 놀라는 소리가 전해졌다. 무방비해진 모습에서 나온 귀여운 소리에 그만 웃음이 터져버렸다.


“하하, 깨어있었어? 자는 줄 알았는데.”


“감탄하느라 잠에 들 틈이 없었어. 부럽다, 피아노 진짜 잘 쳐서. 난 악기랑 완전 상극이거든…….”


부스럭거리는 이불 소리와 함께 세연이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이 곡 제목이 뭐야?”


“아, 내 자작곡이야.”


내 말에 세연은 한층 더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자작곡이라고? 진짜?”


“응, 진짜.”


“……너 피아노 천재야? 막 베토벤의 환생이라든가…….”


한껏 심각해진 그녀의 목소리에 멍해지는 것도 잠시 주저 없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가식 하나 없는, 너무도 진실된 웃음이.


“하하하!”


너는 알까. 별거 아닌 듯 스쳐 지나가는 너의 칭찬 한마디가 얼어버렸던 내 진심을 점점 녹이고 있다는 걸.


“아직 제목은 없어. 괜찮으면 네가 이 곡에 제목을 정해줄래?”


“정말? 그래도 돼?”


“당연하지.”


잠시 고민하던 세연은 오래 지속된 신중함 끝에 내게 정한 제목을 알려주었다. 간단하면서도 기억에 잘 남는 제목이었다.


“혹시, 한 번 더 쳐줄 수 있어?”


“잠들기 전까지 계속 쳐줄게.”


나는 다시 건반에 손을 올렸다. 반짝이는 네가 고통받지 않고 편안한 밤을 보내기를 바라며.


고요했던 이곳에 그리운 피아노의 소리가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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