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 나비 50화
그날 이후 우리는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고, 세연은 매일같이 약국으로 놀러 와 나랑 함께 시간을 보냈다.
“서준아, 많이 바빠? 아이구, 세상 최고 약사는 쉴 틈이 없는구만~”
계산대 앞에 쪼그려서 고개만 빼꼼 내밀며 나를 보던 나날들.
“김서준, 너 또 점심 굶었지? 아무리 바빠도 밥은 먹으라고 했잖아. 그동안 나 없을 때는 대체 어떻게 살았어.”
“……도시락 만들어 왔어?”
“응! 감동이지? 너 내 도시락 좋아하잖아.”
“……응, 진짜…… 너무 감동이야…….”
양손 가득 어설픈 솜씨를 뽐내며 정성‘만’ 가득한 도시락을 들고 내 점심을 챙겨주고,
“노망 났으면 집에 가서 발 닦고 잠이나 잘 것이지.”
“뭐 인마? 새파랗게 어린것이 어디 어른한테!”
“우와, 나이 많이 먹어서 좋으시겠어요?”
가끔 찾아오는 진상들 앞에서는 당당하게 하고 싶은 말 다 하면서 막상 진상이 돌아간 뒤 나와 둘만 남았을 때는 욕먹은 게 억울한 건지, 속상한 건지 곧바로 울음을 터트릴 듯 울먹거리는,
“서준아, 나 심심한데 놀아주면 안 돼?”
밝고 소심하면서 의외로 할 말은 다 하고, 어리광이 많으며, 또 한없이 여리고 여린 바보 같은 정세연.
살며시 싹을 틔웠던 너를 향한 마음이 감당하기 버거울 정도로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가던 어느 날이었다.
“오늘 안경 썼네? 원래 시력이 안 좋아?”
오늘도 어김없이 약국에 놀러 온 세연이 내가 쓰고 있는 안경을 보며 말했다. 세연의 말에 나는 안경을 벗어 카운터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아니, 이거 도수 없어. 나 시력 엄청 좋아.”
세연은 자연스럽게 내 안경을 가져갔다. 이리저리 안경을 살펴보다 안경을 쓰고는 나를 향해 상냥히 웃어보았다.
“……안경 쓴 모습도 예쁘네.”
“응? 뭐라고?”
“아, 아니야. 아무것도.”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린 말에 순간 얼굴이 화끈해졌다. 세연이 못 들어서 다행이군…….
어느 새부터인가, 나도 모르게 살며시 세연을 좋아하고 있었다. 무심결에 심겨진 사랑이라는 새싹은 하나둘 쌓여가는 추억이라는 양분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나 이제 마지막 개화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안경은 왜 쓰고 있던 거야? 도수도 없는데.”
문득 세연이 나에게 물었다.
시력도 좋으면서 도수 없는 안경을 쓰는 이유라. 음, 뭐, 딱히 특별한 이유는 아니었다.
“아버지가 안경을 쓰셨거든. 내가 얼굴이 딱 어머니 반 아버지 반 닮았는데 안경 쓰니까 아버지 어릴 때랑 완전 똑 닮았더라.”
아무렇지 않은 척, 아니 네 앞에선 정말 아무렇지 않게 부모님 이야기를 꺼낼 수 있다.
“그 이유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그냥 조금 공허할 때 안경 쓰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해져서, 그래서 쓰는 거야.”
웃으며 부모님 이야기를 하는 나를 세연이 가만히 바라보다가 카운터 테이블 안쪽으로 들어와 내 앞으로 걸어왔다.
“세, 세연아?”
한 걸음, 한 걸음 내게 가까이 다가오는 세연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해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벽까지 다다른 걸음에 더 이상 도망칠 길도 없이 막힌 곳에서 세연이 내 바로 앞까지 왔다.
세연은 당황함에 흔들리는 내 눈을 잠시 빤히 응시하다 자신이 쓰고 있는 안경을 벗어 내게 씌워주었다.
“아버님이 잘생기셨나 보다.”
요동치는 심장 소리와 사이렌이 울리는 내 머릿속. 그리고 여전히 내 가슴을 간지럽히는 달콤한 너의 미소와 일렁이는 윤슬을 담은 네 눈동자까지.
모든 것이 좋은 핑곗거리였다.
무언가 뚝 끊어지는 느낌과 함께 멋대로 나가버린 손이 세연의 어깨를 덥석 잡고는 몸을 돌려 나와 세연의 자리를 바꾸었다. 세연을 벽에 밀착시킨 뒤 작게 쿵 소리를 발생시키며 오른손을 벽에 붙였다.
작게 숨을 내뱉고 살짝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한껏 볼이 상기된 세연의 얼굴을 보자 그제야 이성이 돌아왔다.
“아, 그, 미안해! 나도 모르게 그…….”
순식간에 가까워진 거리를 다시 넓히려 황급히 벽에서 손을 떼 뒤로 물러나려 하자 세연이 두 손으로 내 가운을 잡고 자신의 쪽으로 확 끌어당겼다. 두 눈을 살포시 감은 세연의 온기 어린 입술이 따뜻이 맞닿았다.
가운을 꽉 잡고 있던 손을 천천히 놓으며 세연이 입술을 뗐다. 천천히 눈동자를 올리는 세연은 나와 눈을 맞추며 슬며시 웃었다. 나는 안경을 벗으며 그녀의 얼굴을 살포시 잡고 다시금 입을 맞추었다.
그렇게 우리의 사랑이 시작되었다.
세연은 나에게 다시 웃는 법을, 다시 우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네가 있었기에 나는 다시 빛날 수 있었다.
그러나, 사람은 늘 행복에 눈이 멀어 뒤따라 오고 있는 불행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마치 그것이 이 비겁한 세계의 역한 이치인 마냥, 언제나 그렇듯 운명의 유흥을 찾아 그렇게 흘러간다.
그저 세연과 평소처럼 데이트가 예정되어 있는 평범한 날이었다. 물론 그 평범은 어디까지나 나의 진심을 꾹꾹 눌러 담은 특별을 선물하기 전까지의 이야기지만.
많이 서툴고 어설플 수도 있으나 마음만은 누구보다 깊은 진심 어린 청혼을 세연에게 할 것이니.
계획한 대로 순조롭게 데이트를 하고 해가 지는 저녁에 바다의 숲이라는 공원에 세워져 있는 분수대 앞에서 청혼을 할 계획이었다. 꼭 세연에게 완벽한 계획으로 최고의 하루를 선사하리라 다짐했다.
벌써부터 빠르게 뛰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려 크게 심호흡을 했다. 미리 사둔 반지를 챙기고 세연이 가장 좋아하는 꽃인 물망초로 만든 꽃다발을 산 뒤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가 바뀌는 걸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약한 진동과 함께 벨 소리가 울렸다. 주머니에 있는 핸드폰을 꺼내 확인해 보니 화면 속 ‘세연♡’라는 글자가 반짝이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화면을 긋고 귀 가까이 핸드폰을 가져다 댔다. 핸드폰 너머로 세연의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준아, 앞에!”
고개를 들어 앞을 보니 치마 끝단에 검은색으로 포인트가 들어간 새하얀 원피스를 입고 있는 세연이 나를 발견하고 환하게 웃으며 손을 크게 흔들었다. 세연은 뭔가 갑작스레 생각난 듯 두 눈을 크게 뜨더니 자신의 목에 찬 목걸이를 내게 들어 보여주었다. 기념일에 내가 세연에게 사준 목걸이였다. 햇살에 비쳐 빛을 반사시키는 다이아몬드로 만든 물방울 모양이 세연을 더욱 빛내주었다. 다이아몬드에 비친 빛보다 네가 더 밝게 빛나고 있었다. 넌, 오늘도 빛나구나.
나도 세연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거 뭐야? 꽃다발이야?”
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세연의 말에 나는 황급히 꽃다발을 뒤로 숨겼다.
“아, 서프라이즈였는데…….”
“하하, 다 보이게 들고 오고 있으면서~”
귀에는 세연의 청아한 웃음소리가, 눈에는 세연이 밝게 웃는 모습이 찬란히 담겼다.
“어, 물망초네?”
“응, 맞아. 네가 제일 좋아하는 꽃이잖아.”
“뭐야~ 기억하고 있었던 거야? 감동인걸.”
“당연히 기억하고 있지.”
곧 있으면 마주하게 될 물망초로 만든 꽃다발을 들고 있을 세연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져 벌써부터 웃음이 절로 나왔다.
“서준아, 물망초의 꽃말이 뭔지 알아?”
“뭔데?”
“진실한 사랑이야.”
진실한 사랑. 꽃말도 나의 청혼을 응원하고 있었다.
순간 신호등이 빨간불에서 초록불로 바뀌었다. 나는 횡단보도를 건너며 앞으로 걸어갔다. 세연에게 진실한 사랑을 약속할 시간의 서막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그때였다. 핸드폰으로 긴급한 세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준아!!”
어느덧 내 앞까지 달려온 세연이 나를 밀쳤다. 나는 그대로 뒤로 밀려 넘어졌다. 그런 내 눈에 비친 장면은 매서운 속도로 돌진하는 트럭에 부딪힌 세연의 마지막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