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막 물망초(14)

불의 나비 52화

by 매화연

길었던 과거의 이야기가 막을 내리자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눈물을 훔쳤다. 다시 도헌에게 시선을 돌렸을 때는 태연한 척 최대한 밝게 웃음을 지었다.


“안 그래도 바쁠 텐데 내가 시간을 너무 오래 뺏은 것 같구나. 이야기가 많이 길었지?”


“아, 아니에요.”


내 눈엔 여전히 작은 꼬맹이로만 보이는 도헌을 보며 몇 번 웃어보았다.


“올해 도헌이가 스물다섯이던가?”


“네.”


“그렇구나. 그래. 벌써, 시간이 그렇게나 많이 지났군.”


그로부터 몇십 년이 흘렀지만 세연을 향한 그리움과 죄책감은 걷잡을 수도 없이 커져가는 반면 세연의 얼굴과 목소리는 붙잡기도 전에 나를 떠나가고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느껴지지도 않으며 어떤 말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던 그 시절의 느낌은 여전히 생생한데.


“……도헌아, 이게 뭘 것 같으냐.”


나는 녹빛의 유리병을 들어 살짝 기울여서 유리를 연상케 하는 투명한 액체를 확인하며 도헌에게 물었다. 도헌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유리병을 이리저리 살폈다.


“잘 모르겠습니다.”


“독약이다.”


내 말에 도헌의 얼굴에 일순 당황함이 묻어났다. 유리병을 다시 하얀 손수건 위에 둔 뒤 손수건을 고이 접고 매듭을 지어 꽉 묶었다.


“새어나갈 일은 절대 없을 테니 안심하고 조심히 들어서 이 대표에게 좀 전해주거라.”


이걸로…… 두 번짼가. 그래도, 나 나름 잘 버티고 있었군그래.


차마 놓지 못하고 마음 한구석에 깊이 못 박아놓았던 그 이름. 그 이름이 다시 세상으로 나오자 간신히 잠재웠던 폭우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치지 않는 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비는 언젠가 반드시 그칠 것이라 그녀가 가르쳐주었다. 하지만, 기약 없는 순간을 기다리며 그 차가운 비를 언제까지고 맞고만 있을 순 없는 노릇이잖나. 스스로 피하던지, 누군가 막아주던지 뭐든 해야지.


어리석게도 그 당연한 것도 몰랐던 시절, 친히 우산을 씌어주며 비를 막아주던 그 사람은 나의 욕심과 오만으로 인해 사라졌다. 우산도 남기지 않은 채 떠난 그 사람을 향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품은 채 또다시 어리석던 시절로 돌아간 나는 멈추지 않는 비를 계속 맞으며 생각했다.


이 비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은 비가 없는 세상으로 가는 것, 단 하나뿐이라.


도헌이 오기 전까지 수도 없이 고민했다. 그냥, 홧김에 먹어버릴까. 애당초 살아 있을 이유가 없는데 이 땅에 발을 디디고 멀쩡히 숨 쉬고 있을 필요가 없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찰나, 문득 속성 대표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언젠가 비가 그치고 무지개 뜬 하늘을 고대하게 해 준 그 녀석들이.


그리고, 그 끝에는 세연의 모습이 떠올랐다. 스쳐 지나가는 얼굴들에 용기가 없어 먹지도 못하는 독약을 비겁한 진심으로 꽉 쥐며 나도 모르게 울고 있었다.


“네, 알겠습니다.”


“부탁한다.”


그때, 문이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이 대표가 안으로 들어왔다.


“이 대표? 무슨 일이냐.”


“너를 찾는 분이 있어서.”


이 대표가 고개를 옆으로 돌려 허공을 일별하고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아무도 없었던 이 대표의 옆에 누군가의 모습이 점차 선명해지며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세연이었다.


“이야기 나누시죠. 저흰 이만.”


이 대표와 도헌이 나가자 평범하기 그지없던 이 공간이 오직 우리 둘만을 위한 무대로 바뀌었다.


나는 힘겹게 걸음을 세연에게로 옮기며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세연의 볼에 닿은 떨리는 손끝부터 점차 젊었을 때의 모습, 세연과 함께했던 그때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내 손바닥이 세연의 온기 어린 볼을 감싸자 세연이 나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살포시 얹었다. 굳은살 하나 없는 고운 손길이 느껴졌다.


혹여 바스러질까 쉬이 안아보지도 못했던 작고 연약한 세연을 한없이 끌어안았다. 그동안 참고 참아왔던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렀다.


“잘 지냈어?”


직접 마주하고도 믿기지 않았던 상황이 세연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현실로 받아들여졌다.


“흑…… 흐윽…….”


“우리 서준이, 완전 울보가 됐네?”


세연을 더욱 꽉 안으며 잠긴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미안해, 미안해 세연아……. 나 때문에 네가…… 전부 나 때문이야. 다 내 탓이야, 미안해…….”


“네 잘못이 아니야, 다 내 선택인 거니까. 만약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똑같은 선택을 해서 널 살릴 거야. 그러니까 미안해하지 마.”


잊혔던 너의 다정한 목소리가 귀에 스며들자 거짓으로 덮인 나의 세상에 온전히 진실과 아픔이 드러났다.


“아이구,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숨이 안 쉬어지더라. 눈을 뜬 채 지새운 밤이 늘어나고, 밥이 안 넘어가고, 방 안에서 한 발짝도 못 나가겠는 것도 네가 보고 싶다는 이유 하나에 당시에는 그 생활을 의식조차 못했는데, 도저히 숨을 못 쉬겠어서…… 살아갈 수 없더라. 근데 그마저도 그 당시에는 안 거슬렸어. 그것보단 네가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에 그냥 미쳐버렸거든.”


나는 세연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나…… 진짜 힘들었어…….”


“고마워. 포기하지 않고 견뎌내 줘서, 잊지 않고 여전히 나를 기억해 줘서.”


세연은 자신의 품에서 나온 나의 눈물을 닦아주며 그때와 같이 환하게 웃어주었다. 너무도 그리웠던 저 밝은 웃음에 밀려오는 울음을 삼키지 못한 채 그대로 흘러 내보내며 잠긴 목소리를 꺼냈다.


“……보고 싶었어.”


“나도 많이 보고 싶었어.”


세연과 눈을 맞추자 다시는 놓치지 않도록 내 마음속 깊은 곳까지 세연을 가득 품고 싶은 갈망이 솟구쳤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내 품에 또다시 세연이 들어오면 정말로 되돌릴 수 없을 만큼 미쳐버릴까 봐, 전하지 못한 그때의 마지막 작별을 전하러 온 그녀를 보내주지 못할까 봐.


“나, 많이 늙었지?”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세연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하나도 안 늙었어.”


나는 다시 잊히지 않게 기억에 새기듯 세연을 한참 바라보다 책상에 있는 반지 두 개를 꺼내 하나를 내 왼손 약지에 끼웠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를 세연의 새하얀 왼손을 조심히 잡아 그녀의 약지에 직접 끼워 주었다.


“그날, 너한테 전해주면서 말하고 싶었는데 너무 늦었네.”


드디어 제 주인을 찾아간 반짝이는 반지를 보던 세연이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을 맞추자마자 눈시울을 붉혔다.


“세연아, 나랑 결혼해 줄래? 너에게 진정한 사랑을 약속하고 싶어. 평생 행복하게 해 줄게.”


결혼, 진정한 사랑, 약속, 평생. 우리에게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실현이 불가한 단어들이었지만 의미만은 이미 충분히 차고 넘쳤다.


세연의 눈가에 차오르던 눈물이 홍조 가득한 볼을 타고 결국 흘러나왔다.


“응, 너무 좋아. 고마워. 평생 간직할게.”


나를 보며 웃는 그리웠던 너의 모습을 다시 보고 있다는 사실이 꿈인 것 같아 또다시 이별이 찾아오고 있다는 현실을 직시할 수 없었다.


“서준아, 나 이제 약 안 먹어도 잘 잔다? 장하지? 칭찬해줘야겠지?”


“……응, 장하네. 너무 장하다, 우리 세연이. 다행이야 정말.”


영원은 찰나가 되고, 기약은 윤슬에 맺혀 심해로 흘러간다. 부디, 다시금 한낮의 햇살이 되는 날이 오기를.


“있지, 나한테 마지막으로 피아노 쳐줄 수 있어? 그 곡 말이야.”


문장 중간에 붙은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내 가슴을 파고 들어갔다.


피아노……. 세연이 밤하늘의 여정을 떠난 이후 버리려고 했으나 피아노를 마주할 때면 세연의 생각이 나 도저히 버릴 수 없어 남겨두었던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친 게 벌써 몇십 년 전인데…… 내가 다시 피아노를 칠 수 있을까,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이미 많이 낡았을뿐더러 고장이 나버렸을 수도 있다.


“당연히 쳐줄 수 있지.”


그렇지만, 나의 아내의 마지막 부탁이었다.


나는 구석에 있는 피아노로 다가가 피아노 의자를 들어 악보를 꺼내고 의자에 세연과 나란히 앉았다.


먼지 쌓인 피아노를 잠시 가만히 응시하다 건반 위에 손을 올렸다. 차가운 온도가 느껴지자 손이 심히 떨리기 시작했다. 한껏 긴장한 마음으로 크게 심호흡을 한 다음 떨림을 담은 손으로 악보에 지정된 음을 찾아 건반을 하나하나 천천히 누르기 시작했다.


굳어버리고 다 잊어버린 줄만 알았던 손은 신기하게도 아직까지 피아노의 선율을 기억하고 있었다. 참, 미련하기도 하지.


예상대로 고장 나버린 피아노는 삐걱거리는 소리와 간혹 엇나가는 음을 연주했다. 극심한 손의 떨림 탓에 자잘한 실수가 연잇고 맞지 않은 음정을 품은 듣기 거북한 연주를 세연은 부드러운 웃음을 띠운 채 눈을 살포시 감고 들어주었다.


‘아직 제목은 없어. 괜찮으면 네가 이 곡에 제목을 정해줄래?’


‘정말? 그래도 돼?’


‘당연하지.’


‘그럼 물망초 어때? 곡 선율이랑 물망초가 잘 어울리는 것 같아.’


‘물망초라, 좋다. 그럼 제목은 물망초로 하자.’


문득 세연에게 처음으로 이 곡, 그러니까 ‘물망초’를 들려주던 그때의 기억이 생각났다.


“서준아, 물망초의 꽃말이 뭔지 알아?”


나의 연주를 듣던 세연이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뜨며 나에게 물었다.


“그럼, 진정한 사랑이잖아.”


“후후, 기억하고 있었네? 맞아. 근데 한 가지 꽃말이 더 있어.”


세연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고 있는 듯 옆에서 따뜻한 시선이 느껴졌다.


“날 잊지 마세요, 야.”


한순간도 빠짐없이 마음 한편에 자리 잡고 있는 그리운 피아노의 소리가 세연의 목소리와 어우러져 이곳에 울려 퍼지며 끝을 향해 달려갔고, 찰나였던 재회의 시간도 이제 막을 내리고 있었다.


“사랑해, 서준아.”


곡의 마지막 음과 함께 세연의 목소리가 멀어져 갔다.


“……나도 사랑해.”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무거운 고개를 떨구니 멈추지 않는 눈물이 피아노 건반 위로 하나둘 떨어졌다.


너의 빛이 여전히, 그리고 영원히 나의 마음에 머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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