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잃어버렸던 날.
2019년 9월 22일, 여전히 선명히 남아있는 그날의 기억과 날짜는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눈에 문제가 생기고 딱 1년 만의 일어난 일은 여전히 내 삶의 선명한 자국으로 남아있다. 자고 일어나니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여전히 어떻게 응급실에 갔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이다. 응급실에서 대기하는 동안, 별로 심각하지 않았다. 그냥 잠시 피곤해서 이러는 것일 거라고 생각했다. 대기 후, 의사 선생님은 나를 불렀다. MRI도 지금 당장 찍을 수 없고, 현재 상황상 집으로 돌아가는 것도 힘드니, 입원을 해서 지켜보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었다. 2주라고 생각하고 시작한 병원 생활.
처음 시작한 치료는 고용량 스테로이드 치료였다. 병명은 '시신경척수염' 흔히 데빅병이라고도 불리는 병이라고 했다. 염증 병변의 길이가 길어서(C2-T10), 왼쪽 다리와 손 마비로 처음 병원에 이송되었고, 손가락 힘이 빠지는 증상도 동반되었다.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스테로이드 치료 시간은 길고 버거웠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토하는 증상을 반복했다. 나중에는 위산이 역류하는 일도 생겼다. 그리고 부정맥으로 눈 앞이 갑자기 꺼지는 일도 다반사였다. 총 4주간의 스테로이드 치료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을만큼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 무렵 조모와 전화를 하게 되었다. 이 상황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조모에게 최대한 태연하게 병원이라고 설명을 했다. 잠깐 아파서 병원에 입원한 것이라고 말이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나도 막막했지만, 그 막막함을 표출할 수는 없었다. 통화는 괜찮다는 말만 연신 되풀이하고 끝냈다. 분명 알 수 없는 찝찝함도 남아 있었지만, 곧 나아질 것이고, 걸을 수 있을 것이라고.. 그리고 평소 삶처럼 되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굳게 믿었던 것 같다.
그렇게 시간이 일주일쯤 지났을까? 그날 아침 다리가 조금은 거뜬해짐을 느꼈다. 힘이 들어가는 듯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제 조금씩 나아지나보다” 하는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고 저녁밥을 먹었다. 여느 때처럼 누워있다가, 씻으려 가려고 일어나려는 그 순간, 다리를 딛고 일어서려는데, 넘어져버렸다. 힘이 전보다 더 빠지는 느낌이랄까 그날 새벽, 전과는 다른 통증들이 나를 찾아왔다. 엉덩이 쪽부터 타오르는 통증과 뻣뻣이 굳는 통증으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새벽에 통증으로 인하여 전공의가 급히 달려왔고, 급히 다시 MRI촬영을 진행했다. 그리고 아침이 왔다. 좋아진 것도 일시적이었고, 갑자기 하지에 힘도 들어가지 않고,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다리가 사라진 것처럼 느껴졌다. 정말 분명 다리는 있는데, 없었습니다. 딱 그 그 느낌이었다. 당황스러웠고, 당황스러웠다. 처음 느껴보는 이상한 기분,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 곧의사는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왔다. 여기저기 두들겨 보더니, 스테로이드 치료에도 불구하고 염증이 진행되고 있어, 스테로이드 치료를 더 해야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래도 곧 전처럼 다시 나아질 것이라고 의사는 말했다.
그렇게 4주가 훌쩍 넘어 어느 날, 재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건 또 다른 힘듦의 시작이었다. 움직이지 않는 것을 움직이는 일 그리고 기능이 없어진 것을 회복하는 일은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재활이 힘들다고 들었지만, 이 정도일줄은 몰랐다. 재활의학과 치료가 시작되고 재활의학과 전공의 선생님이 병실로 찾아 오셨고, 재활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쭈욱 말씀하셨다. 나는 궁금한 것이 있냐는 질문에 담당 선생님은 곧 걸을 수 있을 거라고 들었는데, 언제 걸을 수 있나요?라고 물었고, 그때, 선생님은 사색이 돼서 말씀하셨다.
언제 걸을 수 있을지 신경이 돌아올지
한번 다친 신경은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휠체어를 타야 하고 평생 타게 될 수도 있다!
나는 몸에 갇혀 홀로 사투했고, 갇힌 몸 안에서 생각했다. 더 좋아지진 않을 것 같다, 걷기를 기대하기는 어렵겠구나!, 이제 어떻게 사나.. 그리고 결론을 냈다! ’나는 죽어야겠다' 침대에 누워, 처음으로 다짐했던 것은 죽음이었다. 이렇게 사는 건 내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휠체어를 타고 사회에 나가서 살고 있는 나를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지금 내가 저 통유리까지도 당장 혼자 힘으로 단 한 발자국도 갈 수 없었다. 그저 죽음도 내마음대로 선택하지 못하는 현실에 나는 더 비참했다. 그때 나는 다시 한번 다짐했다.
그래! 죽기 위해서라도 재활하자!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내가 죽기 위해서 재활을 시작한 것을, 죽음을 선택하기 위해, 나의 손으로 죽기 위해 시작한 재활, 호흡 재활과 소근육, 대근육 재활 등을 시작했다.
처음엔 손을 움직이는 것조차 쉽지 않았고, 밥을 나의 손으로 먹는 것은 꿈꿀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호흡재활도 마찬가지였다. 호흡 재활을 할 때, 풍선을 부는 것처럼 정말 쌔게 공이 위로 오를 때까지 불어야 하는데, 사력을 다해 불었지만, 공은 아래서만 열심히 논다. 이후 처음 진행한 재활은 서있는 것이었다. 그게 뭐 힘드냐고 할 수 있지만, 약 한 달간 누워서만 지냈기 때문에, 기립을 한다는 것은 심장에게 많이 부담이 되는 운동이었다. 기립기에 서자마자 5분도 안 돼서 온 세상이 노랗게 되면서 핑 돌았다. 눈을 뜨면 병실이었다. 그렇게 5-6번을 반복하고서야 겨우 10분을 서있을 수 있게 되었다. 하루 1-2분에 시간을 늘려가며 30분을 채우기까지 2주가 넘는 시간이 걸려야 했다.
죽음을 결심하고 재활대에 올라선 나의 마음이 자살에서 살자!로 바뀐 것은 ’누군가 날 믿어주는 힘‘이었다.
그렇게 나는 다시 살아보자! 까짓 거 해보자!라는 생각으로 재활을 진행했고, 한 달이 훌쩍 넘어, 전원을 슬슬 준비해야 했다.
내가 그 당시 꿈꾸던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삶, 내 손으로 밥을 떠서 입에 넣을 수 있고, 나의 힘으로 걸어 학교에 등교하고, 때로는 누군가와 떠들고 웃으며 카페에서 하루를 보내기도 하는 내 삶의 당연했던 그 모든 순간들이었다. 부디 기억하기 바란다. 다른 무엇보다 이 땅을 딛고 서 있을 수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 이미 과분한 복을 누리고 있음을 알았으면 좋겠다. 지금도 누군가는 병원에서 그 평범함을 찾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 평범함의 축복을 아픔이 찾아오고 알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당연한 것은 없고, 감사한 일들의 연속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