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수 있는 것이라곤 걸음을 재촉하는 것밖에 없었다.

by 오션뷰


산티아고에 도착해서 서 두 밤을 잤다. 이틀 연속 밤낮으로 파티가 이어졌다. 길 위의 때를 벗겨낸 순례자들은 서로 나눌 이야기가 너무나 많았다. 길 위의 이야기가 오고 갈수록, 마음 한편으로는 다시 길 위에 서고 싶은 마음이 커져갔다. 결심이 불현듯 차오른 것 같았지만 사실은 이미 길의 중반부 이상을 걸어오면서 차곡히 그리고 조용히 쌓여왔던 것이다. 그렇게 한껏 흥에 겨운 두 번의 밤을 보낸 후 내린 결정은 ‘더 걷고 싶다’였다. 다시 길 위의 것들을 힘껏 껴안고 모든 냄새를 맡고 싶었다.


이틀 만에 다시 길 위에 오르자, 잠시 멈춰있던 모든 것이 제대로 흘러가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가장 걱정되는 것은 갈리시아 지방의 날씨였다. 40일이 넘는 기간 동안 걸어오면서 비도 맞을 만큼 맞아왔고 펑펑 내리는 눈 사이에 갇혀 보기 했지만, 갈리시아의 날씨는 여전히 예측하기 어려웠다. 산티아고에서 세상의 끝이라 불리는 피니스테레(Finisterre)까지 약 90km에 이르는 구간 동안 어떤 여정이 펼쳐질지도 감히 예상할 수 없었다. 그저 길을 따라 걸어가고, 순간마다 감정과 욕구가 뒤섞이는 것을 작게 토해내리라 다짐했을 뿐이다.


알토 도 벤토(Alto do Vento)에서 산타 마리나(Santa Marina)까지 걸어가던 날이었다. 아침부터 우비를 뒤집어쓰고 걸어야 했다. 길 위로 비는 사정없이 내리쳤고, 그런 비를 잠시라도 피할 곳 조차 없었다.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로 2시간을 내리 걸어갔다. 하지만 그날 걸어가고자 했던 길은 그다지 길지 않았기에 참을 수 있었다. 2시간 뒤 갑자기 나타난 바에서 특대 사이즈의 보카디요(bocadillo스페인식 샌드위치)를 입으로 마구 욱여넣었다. 젖은 마음이 조금은 풍족해졌다.


바에서 늦장을 부리다 한 시간을 더 걸었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알베르게와 레스토랑 사인이 동시에 눈에 들어왔다. 알베르게 표지판에 마음이 놓인 나와 J는 레스토랑에 먼저 방향을 틀었다. 그새 배가 고파져 가볍게 디저트와 핫초코를 한 잔 하며 지친 몸을 달랬다. 오늘도 수고한 발을 여러 차례 주무르며 이제 어서 방에 들어가 누워서 쉴 생각에 잔뜩 신이 나 있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그날의 고민이 있다면 저녁으로는 무슨 메뉴를 먹을지 고르는 것이었다.




그렇게 행복한 고민을 하며 400m를 더 걸어가 알베르게에 도착하였다. 큰 길가에 우뚝하니 솟아있는 알베르게에 들어가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아무도 없었고, 아무것도 없었다. 무인으로 운영되고 있는 알베르게 내부에는 커다란 공간에 많이 해진 매트리스 몇 개만 달랑 내버려진 모양새로 누워있었다. 그곳은 이미 여러 밤을 지내온 알베르게가 아니라, 위급상황에 텐트를 치고 잘 수 있도록 공간을 마련해 둔 대피소와 같은 곳이었다. 다른 알베르게도 한 곳 있었지만, 비수기에 접어들면서 장사를 하지 않았다. 다음 알베르게는 8.8km 뒤에 있다는 무심한 대답만 돌아왔다.


날은 이미 어두워질 준비를 마치고 있었고, 우리도 하루를 마칠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미 25km를 걸어온 우리는 8.8km를 더 걷기로 했다. 걸을 수밖에 없었다. 얼굴 위로 여러 차례 비바람이 매섭게 할퀴고 갔다. 바람은 더욱 거세게 불었고, 길은 그날 하루 종일 그랬던 것처럼 여전히 친절하지 않았다. 다리와 무릎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날은 카미노의 한 달 반 중 가장 많이 걸었던 날이었다. 화장실도 너무 가고 싶었고, 동시에 배도 너무 고팠다. 우비는 입으나 마나였다.


주변이 점점 어둑해졌다. 누군가 내 눈에 흐릿한 필터를 끼운 것처럼 주변이 흐리고 어둡게 변해갔다. 아주 작은 빛마저도 어두운 불꽃의 커다란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나도 함께 어두워져 갔다. 한 걸음마다 변해가는 주변의 색에 나는 그동안 느껴온 무게를 잊고, 한 걸음마다 내딛는 땅의 표면을 감촉만을 느꼈다. 어쩌면 날이 밝아올 것만 같은 어색함과, 이렇게 영영 어둠 속에 갇힐 거라는 두려움이 팽팽한 긴장을 조성했다. 무서움에 떨며, 이것은 꿈이라고 몇 번을 되뇌자 조금은 불안감이 가라앉기도 했다. 걸음은 자꾸만 빨라졌고, 배고픔은 비바람만큼이나 강도가 커졌다. 온몸이 홀딱 젖어 그대로 길 위에서 비에 쓸려 간다 해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것 같았고, 비명을 지른다 한들 빗소리에 그대로 묻힐 것만 같았다. 여전히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걸음을 재촉하는 것밖에 없었다.


평소라면 2시간 걸릴 거리를 1시간 반 만에 도착했다. 잔뜩 젖어 들어간 신발과 가방처럼, 몸과 마음도 위축되어 어찌할 바를 몰랐다. 포근한 빛을 찾아 안으로 들어갔지만 문득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다른 세상의 것만 같았다. 짐을 풀기는 했지만, 여전히 걷는 것만 같았다. 따뜻한 주황빛 불빛 아래에서 만찬을 즐기면서도 우리의 시야는 지난 8.8km의 길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다 문득 며칠 전의 일처럼 아득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급히 비워진 우리의 접시 양 옆으로 이예르바스(Hierbas)가 쉬지 않고 채워져 갔다.


다음 날 아침, 오전 9시까지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있다가 겨우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가방 안으로 풀어헤쳤던 물건들을 하나씩 넣는데, 문득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소중하게 느껴졌다. 등산화를 질끈 동여매며 신는 것은 양말을 신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일이 되어있었다. 익숙한 이 행동이 더 이상 익숙하지 않은 것이 될까 봐 벌써부터 아쉽기도 했다. 전날의 피로감에 더해진 숙취는 길을 나섬과 동시에 언제 그랬냐는 듯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렇게 또 한 번 나의 밤이 머문 곳과 이별을 하며, 얼마 남지 않은 거리를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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