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km. 더 이상 걸어갈 길이 없다는 것. 숫자가 줄어드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며 기운을 낼 이유가 없는 것. 걸어갈 길이 줄어드는 것에 연연하지 않고, 걸어온 길에 대하여 으쓱댈 날들도 더 이상 없다는 것. 그 모든 것을 아는 데까지는 만 하루가 넘는 시간이 걸린다는 것. 끝을 향해 걸어왔지만, 끝에 다다르자 모든 것이 거짓말이면 참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 모든 것이 꿈이었고, 그렇기에 꾸었던 꿈을 다시금 꾸고 싶다는 열망. 그렇게 더 이상 걸어갈 길이 없다는 걸 눈으로 정확하게 확인한지도 하루가 지난 시간.
44일 만에 다다른 세상의 끝 피니스테레(Finisterre). 내 두 발이 해냈다는 사실보단 그 끝을 실감해야 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그곳은 세상의 끝에 닿아 목놓아 우는 이들과 그저 멍하니 바다를 향해 있는 이들, 아무것도 믿기지 않아 밤새도록 여러 종류의 술을 마시는 이들이 잠드는 곳이었다. 피니스테레에 도착한 첫날밤, 아무것도 이루지 않은 것처럼 평온하게 바다를 보고, 걸어오는 내내 그랬던 것처럼 술을 마셨다. 하지만 그 언제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을 쏟아내었다. 한번 쏟아진 눈물은 끝내야 할 때를 모른 채, 계속해서 새어 나왔다. 정말로 멈출 줄을 몰랐다.
눈물로 지새운 밤이 지난 후, 마음속에는 여전한 적막감이 맴돌고 있었다. 너무나 많은 시간을 함께 걸었던 J와 헤어진 후 혼자 남아 또 다른 카미노의 가족과도 같았던 일행을 기다렸다. 적막감이 휘감은 틈새로 형용할 수도, 굳이 정의 내리며 표현하고 싶지 않은 온갖 감정들이 내려앉았다. 먹먹했고, 조용했다. 깊고 두터운 고요가 내려앉아 아주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세상의 끝에서 케빈과 만나기로 했다. 그는 도착하여 하루 종일 그곳에 있을 것이라 하였다. 그래 왔던 것처럼 우리는 만날 시간도, 무엇을 할지도 정하지는 않았지만 그와 함께 마실 맥주를 사 가지고 길을 올라갔다. 숙소들이 모인 마을에서 세상의 끝까지는 걸어서 40분 정도가 걸렸다. 가슴이 다시 쿵쾅거렸다. 0.00km이라 쓰인 사인을 다시 봐야 하기 때문일지, 다시 걷는 것 자체에 가슴이 뛰었던 건지는 모르겠다. 세상의 끝에 다다랐을 때, 나와 케빈은 동시에 서로를 발견하고 서로의 이름을 불렀다. 서로의 얼굴만을 확인할 수 있는 거리에서 서로를 향한 표정이 전부를 말해주었다.
그곳엔 케빈뿐이 아니었다. 걸어오는 내내 케빈 다음으로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던 레오와, 그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었던 나탈리아도 있었다. 우리는 넷이서 두 캔의 맥주를 나누어 마셨다. 우리는 선셋을 안주로 삼았다. 그동안 나누었던 포옹보다 훨씬 따뜻한 온도로 서로를 안고선 하늘이 물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세상의 끝에서 보는 선셋은 또 다른 것이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완벽하게 기대고 있었다. 바다로 가까이 향한 바위에 앉아, 서로에게 기댄 채 저물어가는 해를 다시는 보지 못할 것처럼 마음에 담았다. 간간히 임무를 마친 순례자들이 바다 위로 눈물을 떨구는 소리가 귓가로 잦아들었다.
해가 자취를 감추자 주변은 점점 어두워졌다. 하지만 그날만큼은 더욱 어둠 속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우리는 작은 슈퍼에 들러 주전부리와 와인, 그리고 독한 술 몇 병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우리는 북쪽에 하나뿐(이라고 들었던)인 히피 비치로 들어섰다. 주변은 너무 깜깜했다. 나는 내가 어디로 걸어 들어가고 있는지조차 판단하기 어려웠다. 작은 불빛을 따라 할 일을 마친 순례자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할 일이라곤 하루 종일 걷는 것이 전부였던 이들이 이제는 걸을 만큼 걸어, 더 이상 걸을 길을 찾지 못하여 모여든 것이었다. 슬퍼하는 감정과 후련해하는 감정, 그리고 어찌할 줄 모르는 감정이 작은 불빛을 따라 모여들었다.
세상의 끝에 다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모여 앉았다. 길 위에서 오랫동안 봐왔던 친구들도 있었고, 몇 번 보며 간단히 인사를 주고받았을 뿐이지만 그게 다였던 이들도 있었으며, 어찌 된 일인지 얼굴 한 번 마주하지 못했지만 세상의 끝에서 처음 마주한 사람들도 있었다. 모두의 얼굴은 작은 불빛을 받아 일부만 보였다. 어둠에 대부분이 가려진 순례자들이 함께 보내는 히피 해변에서의 밤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맘 놓고 취하고 싶어도 세상의 끝에 다다랐다는 사실이 우릴 덮친 이상, 그 보다 더 취할 수는 없는 밤이었다.
저 멀리 희미한 등대 불빛에 비친 파도가 우릴 향해 열심히 다가왔다. 파도를 쫓아 해변을 뛰었다. 아무리 뛰어도 힘들지 않았고, 그렇게 뛰어간들 그 어느 끝에도 다다르지 않을 것만 같았다. 몇몇은 입고 있던 옷을 벗어던지고 바다를 향해 뛰어들었다. 그들이 점점 눈앞에서 멀어져 갔다. 영영 돌아오지 않을 빛처럼 희미해져 가는 그들의 뒤로 작은 플랑크톤 여러 개가 영롱하게 빛났고, 하늘에선 역시나 제 역할을 다 하는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웃는 소리와 우는 소리로 가득 찬 해변의 어느 끝자락에 선 나는 바다로 뛰어들지도, 하늘로 날지도 못했다. 그저 보이지 않는 끝을 향해 계속해서 시선을 던질 뿐이었다. 누군가가 부르는 노래를 따라 부르고, 이름 모를 순례자들과 흥에 겨워 함께 춤을 춘 밤이지만 여전히 알 수 없는 외로움이 맴돌았다. 허전함은 해변의 어둠을 먹고 자란 후, 세상의 끝에 피어난 적막감이 되어 완벽하게 나를 압도했다. 나는 그렇게 다시 길을 걷지도 못하고 멈추지도 못한 채 세상의 끝에 오래도록 있었다. 부드러운 바닷바람이 만들어낸 연약한 파도만이 제 역할을 충실히 해내던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