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다는 말
가족들과 대부분은 내가 이미 가봤던 곳을 갔다. 가족 여행 이라지만 아무래도 내가 있는 곳으로 가족들을 초대한 것이니 이왕이면 내가 잘 알고 좋아하는 곳 위주로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 한 곳만은 나에게도 처음이었다. 스위스를 여행하는 이들에게 언제나 1순위로 꼽히는 가고 싶은 곳. 맞다, 융프라우(Jungfrau).
내가 살고 있는 로잔과 거리가 꽤나 있기도 하고, 아무래도 관광지라는 인식이 강해서인지 따로 챙겨서 가볼 생각은 하지 못했었다. 한국에서 ‘스위스 다녀왔다.’라고 하면 으레 얘기 나오는 곳이 융프라우인데 가족들과 안 가면 서운하지 싶어 가족 여행의 하이라이트로 넣었다.
융프라우는 해발 4,158m로 유럽의 지붕이라 불린다. 사실, 융프라우에 올라가는 비용이 그렇게 비싼 줄 몰랐다. 스위스는 뭐든지 다 비싸니까 당연히 비싸겠지-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다 융프라우에 가기 하루 전날 비용을 제대로 알아보았다. 1인당 235프랑, 현재 환율 기준 한화 약 31만 원이었다. 심각하게 비싼 금액을 두고 우리는 잠시 머뭇머뭇거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또 나중을 기약할 수는 없었다.
우리는 인터라켄(Interlaken)까지 차를 타고 갔다. 그리고 거기에서 기차를 타고, 아이거 익스프레스라 이름 붙여진 곤돌라를 타고, 다시 기차를 탔다. 정상까지 올라가는데 약 2시간 가까이 소요되었다. 올라가는 길에 우리는 감탄을 멈출 수 없었다. 정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30도가 웃도는 폭염에서 벗어나 기온 3도의 융프라우에 도착해서 우리는 준비해 간 겉옷을 입었다. 하지만 입이 떡 벌어지는 광경에 추운 줄도 몰랐다.
이것저것 구경하고, 사진도 찍고, 아름다운 광경을 가득 담고 하다 보니 시간이 후딱 지나갔다. 기차 시간을 맞추느라 점심도 샌드위치로 대충 때웠기에 허기짐도 함께 밀려왔다. 융프라우는 산악열차 타고 올라가서 스위스 국기 꽂힌 곳에서 사진만 찍는 곳이 다가 아니었다. 생각보다 볼 게 많았다. 우리는 다들 지쳤지만 여길 또 언제 와보겠냐는 마음으로 열심히 융프라우를 즐겼다. 아빠는 비싸긴 하지만 그보다 훨씬 값어치는 하는 곳 같다며 좋아했다.
인터라켄에서 저녁을 먹고 우리는 다시 로잔으로 출발했다. 도착 예상 시간은 2시간 후였다. 언니는 하루 동안 찍은 사진을 구경하다 잠들었고, 아빠는 앞 좌석에 앉으니 운전자 옆에서 졸 수 없다며 가뜩이나 큰 눈을 더 크게 부릅뜨고 있었다. 엄마는 며칠째 많이 걷고, 갑작스레 바뀐 온도차와, 긴 이동 시간에 피곤해했다. 남자 친구가 운전을 하면서 졸음을 이기기 위해 틀어놓은 라디오 소리만이 차 안에 가득 찼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꾸벅꾸벅 졸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라디오 좀 줄이면 안 될까? 아니면 노래만 나오는 걸로 틀면 안 돼?”
문득 엄마가 울상이 되어 말했다.
“왜 그래? 멀미나?”
라고 물으며, 나는 남자 친구에게 라디오 소리 없인 힘들겠냐 했다. 그는 졸음이 와서 완전 끄지는 못하겠고 대신 볼륨을 조금 줄이겠다고 했다. 나는 엄마에게 볼륨이 이 정도면 괜찮냐고 물어보았다. 나는 걱정보다는 피곤 섞인 짜증스러움으로 엄마를 대했다. 그래서일까, 엄마는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몇 분 후, 엄마의 행동이 이상했다. 내 오른편에 앉아있던 엄마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완전히 돌리고 있었는데, 손이 여러 차례 눈가로 갔다. 이상했다. 엄마가 줄어든 라디오 소리보다도 작은 소리로 훌쩍였다.
“엄마 울어?!”
놀란 나는 엄마에게 물어봤다. 하지만 엄마는 대답하지 않았고, 고개를 들지도 않았다. 내가 계속해서 엄마를 보채자, 차 안에는 정적이 흘렀다. 한국말을 모르는 남자 친구는 상황 파악을 하는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우리는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작은 휴게소에 차를 세웠다.
“너 또 엄마한테 툭툭 말한 거 아니야?”
언니의 그 말에 나는 참고 있던 화가 솟구쳤다. 첫날부터 날 덥다고, 힘들다고, 별로 되지 않는 거리인데도 혹사시킨다고 했던 게 누군데, 날씨가 더운 게 어디 내 탓인가, 에어컨 없이 사는 환경 그게 내 탓인가, 내일은 뭐 할 거야? 오늘은 뭐 먹어? 저녁은 몇 시에 먹어? 이제 우리 어디가? 등의 질문 공세에 나도 많이 지쳐가고 있던 터였다. 가족들의 가이드와 인솔자도 동시에 해내야지, 가족 여행을 위해 애써주는 남자 친구도 챙겨 줘야지, 그 사이에서 통역도 해야지, 그런 몇 가지의 부담감과 피로감이 쌓여가고 있던 터였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언니에게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라고 맞받아칠 수 없었던 건, 그 순간 융프라우에서의 내 행동을 돌이켜보았기 때문이다.
“어디로 가? 여기야? 저기야?”
앞서가던 엄마는 방향을 선택해야 할 때마다 나에게 물어보았다. 나는 세 번째쯤 같은 질문에 인상을 확 구기며 말했다.
“아 엄마! 나도 여기는 처음이라구! 내가 어떻게 바로 알겠어? 기다려봐 쫌, 뭐가 그렇게 급해?”
나의 그런 짜증을 받아내고 있는 엄마의 기분이 어떨지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엄마가 나 말고는 물어볼 사람이 누가 있었겠느냐 싶지만, 그때에는 그렇게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당장의 기분을 어찌하지 못하고 성숙하지 못하게 대꾸했던 것이다. 그 장면을 돌이켜 볼 때마다 나의 잘못은 점점 더 명확해졌다. 그 장면에서부터 모서리가 생겨났다. 모서리가 아프게 마음속에서 뒹굴었다.
엄마는 차에서 내려서 마저 눈물을 닦고 있었다. 그런 엄마를 아빠가 달랬다. 나도 차에서 내려서 내가 매몰차게 굴어서 미안하다고, 나도 너무 지치고 힘에 부쳐서 그랬던 거라 하고 싶었다. 하지만 왜 가족 앞에서는 이런 마음에 꾹꾹 담은 말이 잘 안 나오는 걸까? 내게 등 돌린 엄마의 어깨를 바라보다 고개를 떨궜다. 얼마 뒤 아빠가 슬쩍 내 옆으로 와서 이야기했다.
“엄마, 할머니 생각나서 울었데. 좋은데 보니까 할머니도 살아생전 이런데 같이 왔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어서.”
나는 그 말이 거짓말 같았다. 사실 라디오 볼륨을 이야기할 때에도 내가 너무 쌀쌀맞게 군 것 같았다. 뒷좌석 가운데에 앉아서 힘들다는 티를 팍팍 내면서 말이다. 비단 융프라우에서뿐만 아니라 오랜만에 보는 엄마에게 살갑게 굴지도 않았던 것 같아, 내 모든 행동과 말투들이 나에게조차 차갑게 느껴졌다. 엄마에게 미안했다.
얼마 뒤 우리는 다시 출발하였고, 나는 엄마의 옆구리를 콕콕 찌르며 물어보았다.
“엄마 할머니 보고 싶어서 울었어?”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면 나 때문인가?”
여전히 엄마는 말없이 창 밖만 바라보았다. 로잔에 가까워질 때마다, 미안함은 점점 커져갔다. 미안한 마음이 눈덩이처럼 불어났지만, 그 마음을 어찌할 줄을 몰랐다. 꾹 다문 입 안에 미안하다는 말이 쿵쾅거리다 녹아내렸다. 유난히도 뜨겁고 긴 낮이 지질 줄 모르고 계속 우리를 따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