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가족 여행의 마지막 날이 되었다. 다음 날이면 다시 공항으로 가서 가족들을 배웅해야 한다는 게 쉽게 그려지지 않았다. 잠들기 전 일기를 쓰면서, ‘아 내일은 부모님한테 조금 더 잘해드려야지. 오늘(도) 너무 툴툴거렸네.’라고 생각만 하다가 막상 마지막 날이 되자 막상 잘해드린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엄마 아빠가 호텔에서 우리 집을 건너오기 전에 나는 슈퍼를 갔다. 아침에 함께 먹을거리를 사기 위해서였다. 과일 코너를 지나는데 한창 제철인 납작 복숭아가 매대 위에 잔뜩 있었다. 색이 참 고왔다. 문득 엄마가 납작 복숭아 이야기를 했던 게 생각났다.
“여기는 납작 봉숭아가 유명하다며?”
“그냥 제철이니까 먹는 거지, 한국에선 왜 그렇게 납작 복숭아 타령을 하는 거야?”
스위스에 도착한 첫날 엄마가 납작 복숭아 이야기를 했던 게, 마지막 날이나 되어서 생각이 나다니. 나는 주먹으로 이마를 콩콩 쳤다. 나는 실해 보이는 녀석들로다가 몇 개 복숭아를 집어 들었다.
몇 가지 먹을거리들을 사 가지고 집에 가고 있었다. 집에 다 와갈 무렵, 저 멀리 부모님이 오고 있었다. 나를 보기 전, 마지막 날의 거리를 두 눈 가득 담는 부모님의 얼굴 표정을 보고 있으니 새삼 새로웠다. 그리고 나를 발견한 부모님의 표정은 다시 내가 잘 아는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자, 엄마 이거 먹고 싶다며.”
엄마에게 납작 복숭아가 담긴 봉지를 흔들며 말했다. 맘 속으론 ‘엄마! 먹고 싶다고 한 납작 복숭아야. 이제야 생각이 났어. 색도 참 곱지? 어서 들어가서 먹자.’라고 얘기하고 있었지만 그런 말은 늘 소리를 얻지 못하고 맴돈다.
“우와! 엄마 먹으라고 사 왔구나! 아이고, 고마워라.”
엄마의 얼굴이 환해졌다.
나는 서둘러 아침 상을 차렸다. 시리얼, 우유, 빵, 버터, 잼, 요거트, 커피 그리고 납작 복숭아를 씻어 올렸다. 나는 엄마와 가까운 쪽으로 납작 복숭아를 내려놓았다.
“이거 참 예쁘다.”
엄마는 예쁘다는 말을 반복하며 복숭아 사진을 찍었다. 그리곤 먹기 아까운 듯이 복숭아 하나를 손에 올리고 바라보았다. 어여쁜 고양이를 쓰다듬듯 복숭아 하나를 그렇게 쓰다듬고 있었다.
우리들도 복숭아 하나씩을 집어 들고 먹기 시작했다. 아빠는 먹지 않았다. 아빠는 꼭 엄마가 좋아하는 거 있으면 덜 먹고, 엄마는 아빠가 좋아하는 걸 덜 먹고 그런다. 엄마는 한참을 바라만 보던 복숭아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아이고, 달다. 맛있네.”
복숭아는 적당히 무르익고, 달콤했다. 맛이 참 좋았다. 엄마도 기대한 만큼 좋아해서 다행이었다. 엄마가 이렇게 좋아하는 줄 알았으면, 첫날부터 매일같이 납작 복숭아를 사다 놓는 건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나는 그저, “다행이네, 많이 잡숴.”라고 했다.
마지막 날은 피자를 잔뜩 사서 내가 좋아하는 류트리(Lutry)의 호숫가에서 피크닉을 하려고 했다. 그날도 해가 쨍쨍할 줄 알고, 우리는 어디서 파라솔이라도 빌려와야 하는 거 아니냐고 진심 어린 농담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웬걸, 해 쨍쨍이 아니라 비가 왕창 쏟아졌다. 그것도 딱 우리가 피크닉을 하기로 한 시간에 맞춰서. 며칠간 지독히도 겪은 폭염 탓에 비가 반갑기도 했지만, 가족들과 피크닉을 가지 못한다는 것이 속상했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로잔 시내의 한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었다.
가족 여행에서 함께 하는 마지막 식사였다. 다음날은 새벽같이 제네바 공항을 향해 출발해야 했다. 늘 우리 집에서 함께 먹던 아침 식사도 마지막 날은 할 수 없게 되었다. 나는 미리 사둔 샌드위치 두 개와, 티백, 그리고 아침에 남은 납작 복숭아 3개를 함께 담아서 엄마에게 건넸다.
“호텔 도착해서 냉장고에 넣어놓고, 내일 아침에 정신없더라도 챙겨 먹고 나와.”
엄마는 다른 것보다 납작 복숭아 3개에 눈길이 가는 모양이었다.
“어휴 뭐가 이렇게 많아, 복숭아는 너네 먹지.”
“아니야, 엄마 먹어.”
“엄마가 이거 좋아한다고 엄마 챙겨주는 거야?”
나는 무뚝뚝하게 그렇다고 대답했고, 엄마는 기분 좋게 웃었다. 엄마는 납작 복숭아가 담긴 봉지를 소중하게 집어 들었다. 매일 밤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엄마 손에 납작 복숭아 몇 개를 쥐어드렸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를 생각했다. ‘납작 복숭아가 담긴 봉지’가 엄마의 손에 들려 경쾌하게 흔들리며 내던 소리가 귓가에 오래 남았다.
그 뒤로 슈퍼에 갈 때마다 유독 납작 복숭아 매대 앞에서 걸음을 멈추게 된다. 상처가 없는 것들로 복숭아를 하나씩 집어 든다. 복숭아 하나마다 복숭아를 맛있게 베어 먹던 엄마를 떠올린다. 납작 복숭아는 여전히 시즌이 한창이다. 여전히 당도 높은 품질의 납작 복숭아들이 줄줄이 나오고 있지만, 엄마와 함께 먹었던 복숭아의 달콤함을 따라올 복숭아는 감히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