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가족여행 에필로그
가족들을 제네바 공항에 데려다주고 다시 로잔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나는 세상이 떠나가라 꺼이꺼이 울고 있었다. 따뜻한 카푸치노 한 잔을 차마 마시지 못하고 손에 쥐고 있기만 했다. 입에 가까이 가져갈 때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기 때문이다. 나는 여러 번 휑하며 세게 코를 풀었다. 눈이 벌게졌고, 콧속은 헐었다.
막상 가족들을 보내고 나니 기분이 이상했다. 가족들이 곧 도착할 거라는, 가족 여행 전에 느꼈던 그 기분과는 다른 이상함이었다. 가족들이 가고 나니 가족들에게 잘 못해준 것만 생각났다. 그러긴 싫었는데 후회만 자꾸 피어올랐다. 그때 조금 더 상냥하게 대할걸, 한 번 더 눈 마주치고 웃을걸, 모른다고 하지 말고 좀 찾아보고 알려줄걸. 하는 후회들을 멈출 수 없었다. 그래서 자꾸 눈물이 났다.
집에 도착하니 배가 고팠다. 시리얼로 간단히 채운 배가, 편도 한 시간 거리의 공항을 다녀오니 배가 고플 만도 했다. 점심을 먹으려면 아직 한참 있어야 했지만 기다릴 이유를 찾지 못해서 끼니를 때울 준비를 시작했다.
냉장고를 여니 엄마가 끓여주었던 찌개가 남아 있었다. 찌개 남은 국물에 아빠가 라면을 끓여달라고 했지만 내가 끓여 먹을 거라며 아껴두었던 찌개였다. 나는 찌개를 꺼내 다시 끓이기 시작했다. 라면 스프와 건더기를 넣고 고춧가루도 넣었다. 면이 익어갈 때쯤 계란과 파도 넣었다. 냄새가 좋았다.
창밖은 비가 거침없이 오고 있었다. 라면을 먹기 참 알맞은 날씨였다. 라면을 그릇에 덜어낸 후, 한 젓가락 크게 집었다. 부모님이 한국에서 직접 갖다 준 그 젓가락, 부모님 댁에 손님들이 많이 올 때면 나오는 젓가락이었다. 면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김이 부운 나의 눈가에 훅 끼쳤다. 나는 라면을 쉬지도 않고 먹어 치웠다. 라면 스프의 맛보다 엄마가 만들어준 찌개의 맛이 더욱 강하게 느껴졌다. 평소엔 김치 없이 라면 잘 못 먹는데도, 그날은 잘 먹었다.
나는 가족들의 비행기가 조금 늦었지만 제대로 이륙한 것을 확인했다. 가족들이 앉아있던 거실 소파나 함께 밥을 먹던 식탁이 유독 텅 비어 보였다. 2층에서 언니가 잘 때 쓰던 침구류 커버들을 벗겨 내었다. 마음이 휑했다. 그것들을 세탁기를 돌려놓고, 진미채 볶음을 만들기 시작했다. 엄마에게 부탁하여 받은 것이었다. 작은 냉동실 안에 한 자리 차지한 진미채를 꺼냈다. 1킬로 그램짜리였다. 나는 그중 4분의 1을 덜어내었다.
진미채 볶음은 간장 베이스든 고추장 베이스든 먹는 건 기가 막히게 잘 먹으면서도 만들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인터넷을 보고 쉽게 하는 방법을 검색했다. 물엿은 없으니 빼고, 다진 마늘은 귀찮으니 생략했다. 고추장 베이스로 하여 불에 달달 볶았다. 오징어 냄새가 집안에 진동했다. 만드는 내내 침이 꼴깍 넘어갔다. 양념이 몇 가지 빠진 탓에 내가 기억하는 맛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진미채를 먹을 수 있다는 게 좋았다.
가족들은 아부다비에서 환승을 하는 여정이었다. 나는 구글에 가족들의 항공편 명을 검색하여 잘 가고 있는지 수시로 확인했다. 가족들이 아부다비에 도착할 때쯤엔 핸드폰을 손에 꼭 쥐고 있었다. 환승을 하고 와이파이를 잡고 하는데 시간이 좀 걸렸는지 내 예상보다 늦게 연락이 왔다. 가족 그룹 채팅 방에서 이야기를 하다 엄마에게 개인 카톡이 날아왔다.
- 아까 우리 딸 포옹하면 눈물 날 것 같아서.. 못했어. 요즘 내가 이상해 자꾸만 눈물이 나네.
공항에서 가족들을 들여보내며 인사할 때의 이야기였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상하다. 친구들 만나면 안아주기도 잘하고, 남자 친구네 가족들이랑은 볼뽀뽀도 잘하면서 유독 가족들이랑은 그게 너무 어색하다. 공항에서 헤어질 때에도 ‘웃으며 안아 주리라’ 다짐도 하고 시뮬레이션도 혼자 열 번은 했지만, 눈물을 꾹 참느라 웃지도 못하고 안아 주지도 못했다. 빨리 들어가라고 재촉이나 했다.
- 우리 딸 그동안 고생 많이 했어. 푹 쉬어.
- 아니야, 먼길 와서 보여주고 싶은 건 많은데 날씨도 너무 덥고 걸어야 할 곳들이 많다 보니, 고생만 시켰네.
- 우리가 이런 여행을 언제 해. 너무 좋았어.
나는 핸드폰을 손에 쥔 채 또 꺼이꺼이 울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공항에서 돌아오는 길에서 만큼이나 울어 젖혔다.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 졌다. 엄마도 울고 있다고 했다. 아빠나 언니에게 괜히 들키지 않으려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가끔 훌쩍이고 있을 엄마가 눈에 훤했다. 융프라우를 다녀오는 길에 내 옆에서 울던 엄마의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미어졌다.
- 우리 웃자. 자꾸 이러니까 눈물만 난다. 떠날 때 톡 할게.
엄마가 이야기했다. 나는 알겠다고 그러자고 대답하고 집에 오자마자 끓여 먹은 라면 사진을 보냈다. 그리고 이어서 진미채 볶음 사진도 보냈다.
- 오자마자 아까 찌개 남은 거에 라면 끓여 먹었어. 진미채 볶음도 만들었어. 뭔가 빠진 맛이긴 하지만 오징어가 질이 참 좋아. 잘해서 먹을게.
엄마와의 대화는 크고 붉은 하트 모양 하나를 마지막으로 끝이 났다. 약 한 시간 반 뒤 인천으로 향하는 가족들의 두 번째 비행기가 이륙했다.
그날 저녁에 나는 진미채를 열심히 집어 먹었다. 냉장고에 넣었다가 꺼내 먹으니 막 볶아냈을 때보다 훨씬 맛이 좋았다. 나는 한 가닥 한 가닥, 열심히도 씹었다. 몇 달간 그리워하던 맛이라 그런지 젓가락질을 멈추기 힘들었다.
진미채 볶음을 오물거릴 때마다 공항에서 끝내 가족들을 한 번 안아주지 못한 장면이 계속 맴돌았다. 젓가락질을 겨우 멈췄을 때, 또다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코를 휑 풀면서 다짐했다. 몇 달 뒤, 한국에 가서 가족들을 만나면 꼭, 기필코, 반드시 따뜻하게 안아주리라. 웃으며 안아주는 거 아니더라도, 눈물이 나더라도, 혹은 눈물을 겨우 참느라 얼굴이 일그러지더라도. 꼭 따뜻하게 안아주리라. 나는 다시 젓가락질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