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선물

by 오션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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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리프에서 작가로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뉴리프에선 단 한 사람을 위한 글이 지어집니다. 남아있는 감정, 잊히지 않는 이야기, 결코 해소되지 않는 갈증을 일대일 의뢰 형식으로 의뢰하고, 작가의 시선으로 풀어낸 글을 받아보는 형식입니다.

선한 사람들의 선한 영향력으로 시작하는 뉴리프입니다.

https://anewleaf.co.kr/


아래 글은 뉴리프에 작성한 단편 예시글입니다.



유난히도 맑고 청량한 날이었다. 계절은 어느덧 겨울의 한가운데까지 성큼 진입했지만, 추운 게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휴대폰은 아침부터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입력된 메시지들로 채워지고 있었다. 메시지를 타고 날아들어 온 웃음소리는 크리스마스를 하루 앞둔 이들의 설렘을 가득 싣고 있었다. 나도 그 분위기에 휩싸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 해 크리스마스는 내게 그저 끝내지 못한 숙제처럼 다가왔다.


나는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손에 쥐고 거실을 서성였다. 그와 만나기로 한 약속 시간이 다 되어가지만, 발걸음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 억지로 외출 준비는 마쳤지만, 영 기분이 나지 않았다. 단지 그와 전날 크게 다퉜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우리는 같은 언어를 쓰고 있지만, 서로 뜻이 다른 단어들을 나열하고 있었다. 서로 너무나 다른 두 사람의 반복되는 싸움은 시작도 끝도 모른 채 계속되고 있었다. 그것은 끈질기게 나를 옭아맸고, 나는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우리는 점점 함몰되어가는 배에 올라탄 두 선원이었다. ‘우리의 사랑’이 선장이 되어 닻을 올린 배였다. 하지만 두 선원의 서로 다른 의견으로 인해 그 배는 방향을 잃고, 속도 또한 맞추지 못했다. 배는 어느덧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물속으로, 아주 시꺼먼 물속으로, 천천히, 하지만 기울어지는 모든 순간이 세세하게 느껴질 정도로.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찬 공기가 코끝을 훅 스쳤다. 멀지 않은 곳에서부터 우리 집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그가 보였다. 익숙한 그의 걸음걸이가 낯설게만 느껴졌다. 나는 그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그의 손에 들린 커피 두 잔, 찬바람에 약간은 상기된 얼굴, 걸음걸이에 맞춰 흔들리는 머리카락. 나는 그저 멍하니 그가 걷는 것을 바라보다 마지못해 집 밖으로 나갔다.


나는 그에게 다가갔다. 그는 나에게 커피를 내밀었다. 진한 커피 향이 훅 끼쳤다.

“어, 나 방금 커피 마셨는데… 아니야 마실게, 줘.”

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금방 다시 밝아졌다. 이렇게 매번 표정을 읽어 내려가야 하는 것조차 힘에 부쳤다. 우리는 집 앞 놀이터로 향했다. 그가 내민 커피는 너무 뜨거웠다. 나는 뜨거운 커피에 인상을 썼다. 그는 그저 내가 받은 ‘메리 크리스마스’ 메시지들처럼 잔뜩 들떠있었다.


“그래서 내가 몇 개 더 알아봤는데 말이야, 올해 코로나 때문에 취소된 게 너무 많더라고. 여기는 예약이 이미 다 꽉 찼고, 이건...”

놀이터 앞 벤치에 앉으며 그가 말했다. 그가 내민 휴대폰 화면에는 그가 캡처해 둔 사진들이 보였다. 그가 하는 말들은 오래전 말들처럼 희미했고, 그가 보여주는 사진들은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처럼 불투명했다. 나는 놀이터에서 뛰어놀고 있는 어린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마치 그것만이 할 일이 전부인 것처럼.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사람이 말하면 좀 쳐다봐야지.”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내 눈앞에 있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더 이상 예전에 내가 아끼던 모습이 아니었다. 더 이상 내가 안절부절못하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 더 이상 함께 앞날을 꿈꾸던 그가 아니었다. 내 눈앞에 있는 그에게서 더 이상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나와 눈을 맞추고 있는 그에게서 한때 나를 설레게 했던 사람의 흔적을 찾으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저 서로의 살을 도려내듯 끔찍하게 주고받은 말들과 상처만이 보일 뿐이었다. ‘우리’라는 이름은 그저 빈 껍데기에 불과했다.


“나 이제 못하겠어.”

수십 번을 홀로 되뇌던 말, 꼬리에 꼬리를 물던 생각이 내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는 귀를 의심하는 표정이었다. 도대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나 이제 너무 지쳤어. 너에게 남아있는 감정이 없어. 마음이 떠난 지 오래됐는데도 그동안 너에게 말하지 못했어. 너랑 함께 하는 게 힘들 것 같아. 나도 너도 할 만큼 했잖아. 나 너무 힘들어. 너는 그렇지 않아?”

내 안에 갇혀 있던 말들이 터진 둑에서 물이 나오듯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그는 내 팔을 잡고는 말했다. 그의 입술도, 목소리도 떨리고 있었다.

“무슨 소리야, 나 지금 상황 파악이 안돼. 이기적인 건 또 뭐고, 그만하자는 건 뭐야. 내가 잘할게. 내가 다 미안해. 어제 싸운 것 때문에 그래? 내가 다 잘못했어. 내가 노력할게. 응? 우리 사랑하잖아.”


우리 사랑하잖아, 그의 마지막 말이 귓가에 꽂혀 들어왔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그렇게까지 메마를 수 있다는 것에 나 자신도 놀랐다. 아무런 색을 갖다 입혀도, 그 어떤 온도를 표현해도 건조하기 그지없었다. 우리 사랑하잖아, 그 말을 듣고 나자 나는 비로소 해방감이 들었다. 언제 사라졌는지 모를, 아니 어쩌면 애초부터 없었을지도 모를 사랑이었다. 완벽한 깨달음은 오랜 갈증을 풀어주었다. 우리 사랑하잖아, 그 말이 결국엔 사랑은 없었다는 그 오래된 진실을 더욱 선명하게 들려주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그를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그만하자고, 우리!”


그는 계속해서 나의 마음을 바꿔보려 했지만, 나의 귓가에까지 들려오는 말은 없었다. 놀이터를 뒤덮은 아이들의 소리, 달리는 차 소리에 그의 목소리는 묻혀버렸다. 구름이 흘러가는 소리는 들릴지언정, 그의 소리는 결코 내 귓가에 맺히지 않았다. 소리를 잃은 그는 점점 작아졌다. 금방이라도 소멸해버릴 것처럼 그는 자꾸만 작아졌다. 그의 윤곽선은 선명도를 잃었고, 익숙한 우리 집 앞 풍경에 뒤섞여 서서히 녹아버렸다. 지난 4년 동안 가장 자주 보아온 그의 눈이, 코가, 입이 그렇게 흩어졌다.


어느덧 그 자리에는 나뿐이었다. 함께 나눈 우리의 시간을 온통 끌어안고 그는 그렇게 사라졌다. 배를 탄 채로, 배와 함께 가라앉았다. 나는 기울어지는 배에서 뛰쳐나왔다. 시원하게 부는 바람과 파도에 몸을 맡겼다. 추운 줄도 몰랐고, 시간도 잊었다. 그가 나에게 건넨 커피는 어느덧 차게 식어 있었고, 향이 나지도 않았다.

나는 놀이터의 모퉁이에 있는 그네를 향해 뛰어갔다. 오직 나를 위해 기다려 온 것 같은 그네였다. 나는 그넷줄을 두 손으로 잡았다. 그리곤 곧장 그네 위에 올라탔다. 내가 탄 그네는 땅을 힘차게 딛고 높이 올라갔다. 손 뻗으며 하늘이 닿을 높이까지 올라갔다. 바람은 온통 내 것이었고, 나는 하늘을 닮아 파란색으로 물들어갔다.

도시는 발아래에 남았고, 나는 구름과 눈을 맞췄다. 그때까지 쉬어본 적 없던 깊은숨을 들이마시자, 전에 없던 푸른 날숨이 나에게서 흘러나왔다. 그것은 작은 구름이 되어 하늘에 포말을 일으켰다. 나는 오래도록 그네를 탔다. 내 생애 가장 시원한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그리고 나는 비로소 웃으며 말할 수 있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본 저작물은 뉴리프를 통해 작성하였으며, 해당 글은 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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