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가는 채로 머물렀고, 또 머물렀지만 마르지 않았다.
“말리카네 집으로 마루안이 널 데리러 갈 거야! 나도 일 끝내고 바로 합류할게!”
매지드는 큰 도시에서 홀로 시간을 보낼지도 모를 내가 걱정되었는지, 친구 마루안과 내가 함께 시간을 보내게 했다. 이틀 전 카페에서 셋이서 축구 경기를 보며 함께 어울렸지만, 둘이서 몇 시간을 보낼 생각을 하니 조금은 막막했다. 한 번 밖에 보지 않은 외국인의 반나절을 책임져야 한다니, 마루안에게도 막막한 일이었을 것이다.
나랑 비슷한 키에, 마른 체격, 각진 얼굴에 동그란 안경을 낀 마루안. 대학에서 공부한 것도, 좋아하는 도시도, 취미도 서로 다른 우리가 가진 유일한 공통점은 매지드라는 친구를 두었다는 것뿐이었다. 그 유일한 공통점을 가지고 우리는 카사블랑카를 걷기 시작했다. 일요일의 카사블랑카 시내는 한적했다. 마루안이 나를 데리고 걸은 첫 구역은 서울로 치면 여의도와 같았다. 해는 뜨겁지만 시원한 바람에 반팔을 입고 걷기 좋은 온도였다.
우리는 자주 멈춰 섰다. 마루안은 건물들의 용도를 알려주기도 했고, 나무나 꽃의 이름을 말해주기도 했다. 우리는 가깝게 스쳐 날아가는 비둘기의 날갯짓에도 까르르 웃었고, 도로를 향해 일렬로 앉아 커피를 마시며 멍 때리는 사내들의 표정을 보며 키득거렸다.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이 우리를 스쳐 지나갔고, 우리는 그것들을 그저 스쳐 지나가는 것으로 남기지 않았다. 잠시나마 끌어안고 눈을 맞춰, 우리는 그것의 자국을 고스란히 남겨두었다. 스쳐가는 것들과 계절의 몸짓이 어우러져 그것들은 나의 마음에 한 차례씩 올라탔다 내리곤 했다.
우리는 노천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주문한 에스프레소와 카페라테 그리고 작은 생수 두 병이 나왔고, 거리와 하늘과 커피 그리고 서로를 번갈아가며 바라보던 우리는 매지드를 소재로 삼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가장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소재였다. 매지드와 마루안은 일주일에 많게는 다섯 번을 만날 정도로 편하고, 친한 사이라고 했다. 가장 믿을 수 있는 둘도 없는 친구이자, 서로의 가족들까지도 챙길 정도라고 했다.
“그런데 매지드도 이제는 결혼을 했고, 와이프를 따라 이탈리아로 갈 준비를 하고 있잖아.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만나서 커피 마시고, 축구 보고, 술 마시러 다니고 할 때는 몰랐는데 말이야. 요즘에는 거의 이탈리아 이야기만 하니까 마음이 조금은 심란해. 가장 친한 친구가 떠나는 건 무슨 기분일까?
마루안은 카페라테 잔의 손잡이를 애꿎게 만져 대었다. 나도 무어라 한 마디로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앞에 두고 그와 그의 커피잔 사이의 허공으로 눈을 돌렸다.
“매지드뿐만이 아니야. 사실 몇 명의 친한 동네 친구들이 유럽으로 많이 떠났어. 어떤 친구는 걔네 집이 좀 잘 살거든, 그래서 부모님이 프랑스에 있는 학교로 보냈어. 그 녀석, 처음엔 가기 싫어했어, 불어를 잘 못 했거든. 그래도 요즘엔 프랑스 사람 다 되었더라고, 여기 있을 땐 사진도 잘 안 찍던 녀석이 거기에선 사진을 자주 올리더라고. 또 다른 친구는 스페인으로 갔어! 친척 어른 중 한 명이 일하는 회사에서 사람이 필요해서! 운이 좋았지. 늘 카사(블랑카)를 떠나고 싶어 했거든. 바르셀로나는 아니고 근처 소도시에 있는 공장에서 일하는데, 돈도 많이 받고 지내는 집도 괜찮은가 봐. 올해 크리스마스랑 새해 연휴 때에 올지 알았는데, 그때는 여행하고 카사에는 내년 여름휴가 때나 온다더라고.”
카사블랑카를 떠난 친구들을 이야기하는 마루안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어느덧 우리는 커피와 생수까지 다 비워 내었고, 다시 카사블랑카를 걷기 시작했다. 혹시 그렇게 친구들처럼 떠나고 싶지 않느냐고 내가 물었을 때에 우리는 카사블랑카의 메디나 안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마루안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왜 떠나고 싶지 않겠느냐고, 그도 떠나고 싶고 먼 곳으로 여행하고 싶다고. 그를 이끄는 무언가에 홀린 채로 그렇게 흘러가 보고 싶다고. 계절이라는 구분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같은 계절 안에서도 매일 꾸준히 변하는 날씨처럼 자신도 그렇게 조금씩이라도 흐르고 싶다고.
“그렇게 계절처럼 조용히 움직일 거야. 카사가 얼마나 큰데, 이 안에서 이렇게 조용히 이곳저곳 다니기도 쉽지 않아. 계속 이렇게 걷다 보면 우리는 메디나를 벗어날 것이고, 그럼 또다시 조용해질 거야. 조용한 구간도 걸어갈 것이고, 커다란 모스크도 지나갈 것이고, 바다에 닿을 것이고. 그래야 바다를 건널 수도 있을 테니까."
내 상상 속에서 이미 마루안은 바다를 건너고 있었다. 계절처럼 서두르지 않고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아무도 보지 못하는 파도를 넘고, 아무도 듣지 못하는 바람을 타고, 그가 새롭게 이름 붙인 계절 속에서 피어나는 꽃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는 흘러가는 채로 머물렀고, 또 머물렀지만 마르지 않았다. 유연했고, 꾸준히 변했으며, 다치지 않고 머물렀다.
“아까 우리가 트램 내린 곳 있지? 거기 바로 앞에 내가 평일마다 가는 학원이 있어. 나 저기서 독어 공부해! 내가 공부한 아이티 분야로 일을 구하고 싶어. 독일에는 그런 일자리가 많다고 들었어. 지금 내 수준으로도 할 수 있는 일이 많다고 하는데, 문제는 언어야. 영어로도 일단은 괜찮다고 하지만 한계가 있데. 그래서 어쨌든 그 나라 말을 해야 된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요즘 저기에 가서 하루에 네 시간씩 수업 듣고, 두 시간씩 공부하고 그래.
공부 끝날 시간이 되면 매지드가 일 끝내고 근처에 있다가 같이 만나곤 해. 그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독일에 가게 되면, 이탈리아랑 가깝지는 않지만 그래도 카사보단 가깝잖아! 카사에서도 둘이서 그렇게 다닐 곳이 많았는데, 거기선 더 엄청나겠지?”
마루안이 멋쩍게 웃으며 이야기했다. 숨겨온 이야기를 내보였다는 듯, 하지만 그렇게 자신의 계획을 밝힘으로써 다시 한번 본인에게 다짐을 하는 듯이 그렇게 이야기했다. 우리는 메디나를 벗어나 바다 쪽을 향하여 계속해서 걸었다. 아무도 보지 못하는 물살을 휘젓고 가듯이, 우리만 아는 우리의 각오를 촘촘히 흩뿌려 놓듯이, 머물듯이 머무르지 않을 듯이 그렇게 카사블랑카를 계속해서 함께 걸었다.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파도 소리에 심장이 뛰었고, 그 소리에 드넓은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것만 같아 발걸음이 빨라졌다. 스쳐 지나가는 것이 가슴에 맺혔고, 우리는 그것들을 살포시 안고 걸었다. 머무른 것들에게 작은 움직임을 주어 경쾌한 변화를 주었다. 함께 멀리 내다보는 것들과 소망의 몸짓이 어우러져 그것들은 우리와 발걸음을 한 차례씩 맞추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