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차, 규제, 그리고 ‘사람’이 중심이 되는 순간
자율주행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면서, 이제는 사람이 운전하지 않아도 자동차가 스스로 길을 찾아가고, 사고도 줄일 수 있는 세상이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이 기술의 궁극적인 목표는 명확합니다.
"사람의 실수로 일어나는 교통사고를 줄이자."
사실, 자율주행차 개발의 가장 큰 출발점은 바로 운전 중 발생하는 인간의 실수였습니다. 졸음운전, 주의 산만, 판단 착오 등은 우리가 매일 도로 위에서 마주치는 위험요소들이죠. 자율차는 이 모든 것을 줄이기 위한 해결책으로 떠올랐고, 자동차 회사들은 안전하고 효율적인 이동을 위해 엄청난 자본과 기술을 투자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자율주행차가 상용화되면, 우리는 출퇴근길에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볼 수 있고, 운전 스트레스 없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게 됩니다. 말 그대로, 운전에서 '해방'되는 시대가 열리는 겁니다.
그런데 미국은 왜 사람 운전자의 ‘영어 실력’에 집착할까?
이런 흐름 속에서 미국의 교통 정책은 다소 역행하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2025년 6월 25일부터, 미국 교통부(DOT)는 상업용 트럭 운전자가 영어를 잘 못하면 즉시 운전을 멈추게 할 수 있다는 규제를 발표했습니다.
영어 시험도 없이, 검문 중 검사관이 “ELP 부족(English Language Proficiency)”을 판단하면 곧바로 정지 명령! 이건 꽤 강력한 조치입니다. 이전에는 영어 능력 기준이 있었지만, 이렇게 현장에서 즉시 제재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죠. DOT(미국 교통부)는 도로 표지판을 못 읽거나, 경찰이나 검사관과의 소통에 문제가 생겨 사고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이유를 들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 규제는 단순히 ‘안전’만이 아니라, 연방 자금, 이민 정책, DEI(다양성·형평성·포용성) 등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규제에 불응하거나 관련 정책을 잘 따르지 않으면 보조금 삭감, 계약 해지, ICE(이민세관단속국) 협조 의무 같은 제재가 뒤따릅니다.
※ DEI (Diversity, Equity, and Inclusion) – 다양성, 형평성, 포용성
웨이모가 무인택시를 굴리는 나라에서, 영어 못하면 운전 못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하나의 아이러니를 마주하게 됩니다.
자율주행 기술의 선도국인 미국, 그 중에서도 캘리포니아와 애리조나 등 일부 주에서는 웨이모(Waymo), 크루즈(Cruise), 그리고 테슬라(Tesla) 같은 기업들이 이미 사람 없이 움직이는 무인택시를 실제 도로에 운영하고 있습니다.
웨이모는 피닉스와 샌프란시스코에서 완전 무인 로보택시를 서비스하고 있으며,
크루즈는 GM 자회사로 샌프란시스코에서 시범 운행을 시작했고,
테슬라는 자사 차량에 탑재된 FSD(Full Self-Driving) 기술을 기반으로 점점 더 높은 자율주행 단계를 구현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운전자 없는 차’를 만들고 있는 나라에서,
정작 ‘사람 운전자’에게 영어 실력을 근거로 운전 금지를 내리는 규제가 도입된다는 사실은
분명 기술과 제도 사이의 충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이는 단순한 언어 능력 문제가 아니라, "무엇이 안전을 보장하는가?"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다시 던지게 합니다. 기술이 '사람의 실수'를 줄이기 위해 발전하고 있다면, 그 사람에게 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는 방향은 어떤 의미일까요?
기술은 ‘시스템’에 안전을 맡기지만, 규제는 ‘사람’을 강조
여기서 자율차와 트럭 운전자의 현실은 극명하게 갈립니다.
* 자율차는 AI 시스템이 판단하고 제어하는 ‘E2E(End-to-End)’ 시스템으로, 사람의 개입을 줄여나가고 있습니다.
* 반면, 트럭 운전자는 여전히 사람이 도로 위의 판단 주체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영어를 잘하지 못하면, 그 자체로 ‘위험 요인’이 된다는 겁니다.
심지어 미국 교통 정책은 2016년 오바마 정부 당시의 완화 기조를 뒤집고, 마치 트럼프 행정부 2기 대비 규제 복귀처럼 보이는 정책 방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안전이라는 이유 뒤에, 정치적 메시지가 함께 담긴 것이죠.
그리고 한편, 스타벅스는 키오스크를 늘리고 있다?
인간적인 소통을 중시하던 스타벅스는 이례적으로 한국과 일본에 외국인 관광객이 많은 지역에서 키오스크를 도입하고 있습니다.
명동이나 제주도처럼 유동 인구가 많은 지역에선 주문 시 언어 장벽을 없애고, 고객 편의를 높이기 위해 무인 주문 시스템을 강화하고 있죠.
이런 스타벅스의 움직임은 흥미로운 대비를 보여줍니다.
* 미국 정부는 언어 능력이 부족한 사람을 ‘제외’하는 방식으로 안전을 강화하려 하고,
* 스타벅스는 언어 장벽을 기술로 ‘극복’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겁니다.
자동차공학회에서 본 ‘기술 vs 규제’의 시선 차이
최근 참석한 자동차공학회 세션에서도 이와 관련한 흥미로운 발표들이 있었습니다.
자율주행의 시스템 구성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 모듈형 시스템(Modular): 센서 → 인식 → 판단 → 제어로 나뉜 구조로, 각 단계가 명확히 분리됨.
* 엔드투엔드 시스템(E2E): 센서 데이터에서 바로 차량 제어 신호를 생성하는 일체형 구조. 판단 과정을 AI가 전부 담당.
이 두 방식은 기술적 특성뿐 아니라 사람의 개입 정도와 책임 분산 방식에도 차이를 만듭니다.
그리고 현행 교통 규제는 여전히 ‘사람이 시스템’의 일부로 남아야 한다는 전제를 따르고 있는 셈입니다.
좋은 규제란 무엇인가?
미국의 영어 능력 강화 규제가 정말 ‘안전을 위한 착한 규제’일까요?
아니면 비영어권 이민자나 외국인을 배제하기 위한 ‘장벽’이 되는 나쁜 규제일까요?
기술은 빠르게 발전합니다.
하지만 규제는 늘 그 속도에 맞춰 움직이지 않습니다.
기술이 인간의 한계를 보완하려는 반면, 규제는 인간에게 더 많은 책임을 요구하기도 하죠.
미국의 트럭 운전자 영어 능력 강화 사례는,
"과연 안전이란 무엇으로 지켜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질문을 더 자주, 더 깊이 고민해야 할 시점에 와 있는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