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이 자율주행에서 뒤처진다고요?

미국·중국이 도로를 달리는 동안, 유럽은 판을 다시 짜고 있습니다

by 조성우


테슬라가 오스틴 시내를 무인으로 달리고, 바이두의 로보택시가 베이징 도심에서 승객을 태우는 사진이 뉴스에 오르내리는 동안, 유럽은 조용했습니다.

자율주행 기술 경쟁에서 유럽이 밀리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 지도 꽤 됐습니다. 그런데 2025년 12월, EU 집행위원회가 조용히 발표한 하나의 법안이 이 구도를 다르게 읽게 만듭니다. Automotive Omnibus. 기술이 아니라 규칙의 판을 새로 짜는 작업이 시작됐습니다.



미국과 중국은 이미 달리고 있습니다


미국의 자율주행은 기업이 먼저 움직이고 규제가 뒤따르는 구조입니다. 웨이모는 샌프란시스코와 피닉스에서 유료 로보택시를 운영 중이고, 테슬라는 FSD를 통해 수백만 대의 차량에서 주행 데이터를 축적합니다. 연방 정부는 큰 틀만 정하고, 실제 운행 허가는 주 정부가 결정합니다. 규제가 촘촘하지 않다는 비판도 있지만, 그 덕분에 기업들이 빠르게 실증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중국은 방식이 다릅니다. 정부가 먼저 투자하고, 기업이 그 위에서 속도를 냅니다. 바이두·포니에이아이·위라이드는 베이징·상하이·광저우에서 이미 운전자 없는 로보택시를 상용 운행 중입니다. 2025년 기준으로 중국 내 자율주행 허가 구역은 수십 개 도시로 확산됐습니다. 국가 주도 데이터 공유와 인프라 투자가 속도의 원동력입니다.


이 두 나라를 보면 유럽은 분명히 뒤처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유럽이 싸우는 게임은 처음부터 달랐습니다.


유럽은 다른 질문을 하고 있었습니다


미국과 중국이 “얼마나 빨리 달릴 수 있는가”를 묻는 동안, 유럽은 “이 차가 전 세계에서 팔릴 수 있는 기준을 누가 만드는가”를 묻고 있었습니다.


유럽의 차량 인증 체계는 WVTA(유럽 차량 형식승인)라고 불립니다. 유럽에서 팔리는 차는 모두 이 인증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체계는 UNECE(유럽경제위원회)가 주관하는 1958년 국제 협정에 뿌리를 두고 있고, 이 협정에는 EU뿐 아니라 일본·한국·영국·호주 등 54개국이 가입해 있습니다. 한 나라에서 받은 인증이 54개국에서 그대로 통용되는 구조입니다.


여기서 핵심이 나옵니다. 유럽이 자율주행 인증의 기준을 먼저 정하면, 그 기준이 54개국의 표준이 됩니다. 미국과 중국이 도로에서 기술을 증명하는 동안, 유럽은 그 기술을 글로벌 시장에 내놓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할 관문의 규칙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Automotive Omnibus — 문이 없던 곳에 문을 만들다


기존 유럽 규정에는 구조적 모순이 있었습니다.

자율주행 L4 차량, 즉 핸들도 페달도 없고 사람 없이 스스로 운전하는 차를 정식으로 대량 판매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기존 형식승인 체계가 “운전자가 항상 탑승한다”는 전제로 설계됐기 때문입니다. 예외 허가로 소량(연간 1,500대 수준)만 운행할 수 있었고, 상업화는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2025년 12월 발표된 Automotive Omnibus는 이 벽을 허뭅니다. 핵심은 단 하나입니다. L4 자율주행 시스템(ADS) 탑재 차량에 정식 형식승인 경로를 만들어, 대량 생산과 판매를 허용하는 것입니다.


단계적으로 진행됩니다.

2025년에는 자동 발렛 주차(차가 스스로 주차장을 찾아 주차하는 시스템)부터 시작합니다.

2026년에는 물류 허브 간 자율 화물 운송, 이후 로보택시로 확대됩니다. 처음부터 모든 사용 사례를 한꺼번에 여는 대신, 기술 검증이 비교적 명확한 사례부터 순서대로 문을 여는 방식입니다.


공공 도로 시험 허가도 바뀝니다. 지금은 ADAS나 ADS 기술을 유럽 도로에서 시험하려면 나라마다 따로 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독일에서 허가를 받아도 프랑스에서 또 받아야 합니다. Omnibus는 2026년부터 EU 단일 허가 절차를 도입해 이 중복을 제거합니다. 국경을 넘는 대형 자율주행 시험 도로도 3곳 이상 구축합니다.



사이버보안과 소프트웨어 업데이트

Omnibus를 이야기할 때 UN R155(사이버보안)와 R156(소프트웨어 업데이트) 규정이 함께 언급되곤 합니다. 정확하게 짚어둘 필요가 있습니다.

이 두 규정은 Omnibus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자율주행 레벨과 무관하게, L1부터 L4까지 모든 커넥티드 차량에 이미 적용 중인 독립 규정입니다. R155는 차량 해킹 방지 시스템의 구축과 인증을 요구하고, R156은 소프트웨어 원격 업데이트(OTA)를 안전하게 관리하는 체계를 요구합니다. 2022년부터 신규 차종에, 2024년부터 전 생산 차량에 의무화됐습니다.


이 규정들이 Omnibus 맥락에서 언급되는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Omnibus가 L4 차량의 대량 판매를 허용하면, 이 규정들의 적용 대상이 대폭 늘어납니다. 특히 R156은 Omnibus가 전제하는 ‘지속적으로 업데이트되는 자율주행 차량’ 운영의 법적 토대입니다. Omnibus가 가능하게 만드는 세계를 지탱하는 기반 규정이라는 의미에서 연결되는 것이지, Omnibus가 새로 만들거나 강화하는 규정이 아닙니다.



유럽이 실제로 늦은 것과 늦지 않은 것


솔직히 말하면, 기술 실증의 속도에서 유럽은 미국·중국에 뒤처져 있습니다. 웨이모가 수백만 킬로미터의 무인 주행 데이터를 쌓는 동안, 유럽에서는 그에 필적하는 민간 자율주행 실증이 아직 없습니다. 이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상용화의 전제 조건을 만드는 속도에서는 다릅니다. 자율주행 차량이 글로벌 시장에서 팔리려면 각국의 형식승인을 받아야 합니다. 지금 유럽이 만들고 있는 인증 체계는 54개 체약국에 직접 적용됩니다. 미국 기업이든 중국 기업이든, 유럽 시장에 들어오려면 이 기준을 통과해야 합니다. 기술 경쟁의 결승선이 아니라, 결승선의 모양을 설계하는 작업이 지금 브뤼셀에서 진행 중입니다.


Automotive Omnibus는 2026년부터 협상이 본격화되고, 최종 채택까지 수년이 걸릴 전망입니다. 미국과 중국의 로보택시가 도심을 달리는 속도에 비하면 더딘 과정입니다. 하지만 이 법안이 확정되는 순간, 자율주행차를 전 세계에 팔기 위한 글로벌 인증의 기준점이 유럽에서 정해집니다.


누가 먼저 달리느냐와, 누가 달리는 방식을 정하느냐는 다른 게임입니다. 유럽은 두 번째 게임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참고: EU Commission, Automotive Action Plan (2025.03.05) / EU Commission, COM(2025) 993 final — Automotive Omnibus Proposal (2025.12.16) / Taylor Wessing, Legal framework for automated and autonomous driving and teledriving in the EU and Germany (2026.02) / DigitalEurope, Embracing the future of mobility (202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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