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버 프로비저닝과 UN R 156
오늘날 자동차는 '바퀴 달린 컴퓨터'라 불릴 만큼 복잡한 소프트웨어와 첨단 하드웨어의 집약체입니다. 특히 소프트웨어 정의 차량(SDV)은 차량의 기능과 성능이 소프트웨어에 의해 좌우되고, OTA(Over-the-Air) 업데이트를 통해 끊임없이 진화하는 새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이러한 혁신을 주도한 선구자가 바로 테슬라입니다.
테슬라는 OTA 업데이트를 통해 차량의 편의성을 극대화하고, 원격으로 문제를 해결하며, 성능을 지속적으로 향상했습니다. 그러나 테슬라는 이 과정에서 하드웨어의 중요성을 간과하며 큰 교훈을 얻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오버 프로비저닝(Over-provisioning)의 필요성이었습니다.
오버 프로비저닝은 초기 설계 단계부터 미래의 소프트웨어 확장과 업데이트를 고려해, 실제 필요 이상의 하드웨어 성능과 용량(CPU, GPU, 메모리, 센서 등)을 미리 확보하는 전략입니다. 마치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비상금을 챙겨두는 것처럼, 차량 내부에 보이지 않는 여유 공간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이는 실시간 작업의 안정성을 높이고, 잦은 OTA 업데이트로 인한 저장 장치의 마모를 최소화하여 시스템 안정성을 보장하는 핵심 요소입니다.
전통적인 자동차 리콜은 엔진이나 브레이크와 같은 기계적 하드웨어 결함을 해결하기 위한 부품 교체가 주를 이뤘습니다. 하지만 SDV는 자율주행, 인포테인먼트 등 다양한 기능을 복잡한 소프트웨어 시스템에 의존합니다. 이는 스마트폰처럼, 차량의 기능이 소프트웨어 업데이트에 따라 변화하고 개선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변화는 리콜의 성격 또한 바꾸었습니다. 2011년 전체 리콜의 5%에 불과했던 소프트웨어 결함 비중이 2022년에는 65%로 급증한 자료는 이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SDV 시대에는 소프트웨어 결함이 곧 대규모 리콜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테슬라는 2012년부터 2018년 초까지 생산된 일부 모델에 8GB eMMC 메모리를 탑재했습니다. 이 메모리는 차량의 로그 데이터를 저장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테슬라가 충분한 용량을 확보하지 않아 예상보다 빠르게 마모되었습니다.
잦은 OTA 업데이트로 인해 로그 데이터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메모리의 수명이 단 5~6년 만에 다했고, 이로 인해 터치스크린, 오토파일럿 등 핵심 기능이 마비되는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결국 테슬라는 미국 고속도로교통안전국(NHTSA)의 리콜 명령에 따라 약 15만 8천 대의 차량에 대해 메모리를 64GB 버전으로 무상 교체해야 했습니다. 이 사건은 오버 프로비저닝의 부재가 얼마나 큰 비용과 고객 불만을 초래하는지 극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테슬라의 사례는 오버 프로비저닝의 중요성을 입증했으며, 이는 이제 법적 의무로까지 확장되고 있습니다. 2021년 발효된 UN Regulation No. 156(UN R 156)은 소프트웨어 업데이트 관리에 대한 새로운 기준을 제시합니다.
제7.2.2.1.2: 소프트웨어 업데이트 실행 시, 이전 상태로 복구(롤백)하는 데 필요한 충분한 하드웨어 자원(메모리 공간, CPU 성능 등)을 확보해야 합니다.
제7.1.1.7: 업데이트 전에 대상 차량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호환성을 평가해야 합니다.
이러한 조항들은 제조업체가 하드웨어 용량을 미리 확보하고 충분한 자원을 갖춰야 함을 명시하며, 오버 프로비저닝이 더 이상 선택이 아닌 필수임을 시사합니다.
오버 프로비저닝은 스마트카의 복잡성, 지속적인 소프트웨어 업데이트, 그리고 안전과 안정성에 대한 높은 요구를 충족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자 법적 요구사항입니다. 초기 비용이 증가할 수 있지만, 차량 수명 내내 기능을 추가하고, 예측 불가능한 소프트웨어 변화에 안정적으로 대응하며, 궁극적으로는 리콜을 줄이고 OTA 업데이트 성공률을 높이는 핵심 요소입니다. 테슬라의 eMMC 사태는 아무리 우아한 소프트웨어도 이를 뒷받침할 하드웨어가 없다면 무용지물이 된다는 현실을 몸소 보여준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SDV 시대는 자동차 제조사와 정부의 안전 관리 부서에게도 새로운 변화를 요구합니다. 기존의 '출고 시점' 중심의 정적 평가에서 벗어나, OTA로 바뀌는 SDV의 특성을 반영해 버전별 안전 관리 시스템을 도입해야 합니다. 변경 이력을 투명하게 관리하는 것이 곧 미래 자동차의 신뢰성을 지키는 핵심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