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대부분 거창한 이유로 살지 않는다

소설 속 문자 한 줄이 나를 멈추게 했다

by Lucid


소설을 쓰다가 손이 멈춘 적이 있다.

내가 쓴 문장인데, 내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너'라는 착각.


화면을 한참 바라봤다. 이게 무슨 뜻이지. '너'가 착각이라면, 지금 이걸 쓰고 있는 '나'는 뭔가.



민수는 특별히 불행하지 않았다. 그냥 지겨웠다.


민수는 새벽 알바를 마치고 침대에 누운 스물셋이다. 1인가구. 보일러는 돌아가는데 방은 싸늘하고, 천장엔 곰팡이인지 물자국인지 모를 얼룩이 있다.


그녀는 극적으로 무너지지 않는다. 그냥 희미하게 꺼져가는 중이다.


나는 그 감각을 쓰고 싶었다. 우리가 살면서 가장 자주 느끼지만 가장 말하기 어려운 것.

불행하다고 하기엔 애매하고, 괜찮다고 하기엔 분명히 뭔가 이상한 그 상태.

그 상태의 민수에게 익명의 문자가 온다.


'지금, 보고 있는 건 누가 보고 있지?'


이 문장을 쓰고 나서 나도 멈췄다. 민수처럼. 생각이 생각을 낳고, 그 생각을 또 보고 있는 뭔가가 있고, 그 뭔가를 또 보고 있는 뭔가가 있었다.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것들이 계속 거기 있었다.


익명의 문자는 말한다.


'찾지 마. 찾는 순간, 네가 만든 답만 나와.'


그래서 나도 찾지 않기로 했다. 그냥 뒀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글이 다시 써지기 시작했다.



민수는 결국 한강 난간 앞에 섰다.


나는 이 장면을 쓰면서 일부러 천천히 썼다.


강바람이 불고, 물은 멀리서 검고 조용하다. 민수는 아무것도 결심하지 않은 채로 거기 서 있다. 살겠다는 다짐도 없고, 극적으로 무너지는 감정도 없다. 그냥 난간의 차가운 쇠를 손끝으로 짚으며, 서 있다.


그때 그 질문이 다시 온다.


'지금, 보고 있는 건 누가 보고 있지.'


민수는 대답하지 않는다. 대신 몸이 먼저 돌아선다.

이유는 없다. 그냥 춥다. 그냥 배고프다. 그냥, 발이 먼저 움직인다.


나는 이게 삶에 가장 가까운 장면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대부분 거창한 이유로 살기로 결심하지 않는다. 머리가 아니라 몸이 먼저 안다. 아직 여기 있어야 한다는 걸, 발이 먼저 알고 움직인다.



소설을 다 쓰고 나서야 알았다.


그 질문은 민수에게만 던져진 게 아니었다.

쓰는 내내 나는 어느 정도 민수였고, 어느 정도는 그 익명의 문자였다. 소설이 허구라는 건 알지만, 그 안에서 건드려진 건 허구가 아니었다.


'너'라는 착각.


나는 아직도 이 말의 뜻을 다 안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이제 그걸 굳이 다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쫓으면 사라진다는 걸, 어쩐지 알 것 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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