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라는 종을 거부한다

도로 위의 디스토피아

by Lucid

오늘 아침도 현관문을 열기 전, 나는 잠시 숨을 고른다. 문밖을 나서는 순간 마주쳐야 할 ‘인간’이라는 종에 대한 근원적인 피로감 때문이다. 누군가는 나를 예민한 부적응자라 부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단언한다. 내가 느끼는 이 거부감은 단순한 기심(己心)이 아니라, 본질을 상실한 채 껍데기만 남은 인류를 향한 정당한 저항이다.


길거리로 나서면 가장 먼저 목격하게 되는 풍경은 기괴하기 짝이 없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수많은 이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고개를 꺾고 손바닥만 한 스마트폰 화면 속에 영혼을 저당 잡혀 있다. 대한민국 보행자 통행 원칙은 우측통행이다. 이건 초등학교 도덕 시간에도 배우는 최소한의 사회적 약속이다. 하지만 그들은 ‘중앙선’이라는 개념 자체가 마비된 듯 당당하게 반대편을 침범해 온다.


나는 종종 이 무신경한 부류들과 길거리에서 멈춰 선다. 비켜주지 않고 버티다 보면 결국 어깨가 부딪히고, 날 선 쌍욕이 오가며 멱살다짐 직전까지 가는 소동이 벌어진다. 그들의 눈을 보면 섬뜩함을 느낀다. 자아라는 감옥에 함몰되어 타인의 존재를 인식조차 못 하는 그 텅 빈 눈동자들. 그 눈앞에 서면 나는 극도의 무력감과 분노가 동시에 치밀어 오른다. 저 단단히 봉인된 자아의 껍데기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강제로 깨뜨려버리고 싶다는 충동. 물론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저 지나친다. 그것이 이 사회가 나에게 허락한 유일한 선택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게 서로에게 무례하고 무감각한 존재가 되었을까. 돌이켜보면 삐삐조차 없던 어린 시절의 인간들은 지금보다 훨씬 순진했다. 그때는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되는 것만으로도 나름의 만족을 누릴 줄 알았다. 하지만 21세기 디지털 문명은 인간의 탐욕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이제 인간은 실재하는 세상이 아니라, 화면 속 가공된 세상에 자신을 투영하며 끊임없이 타인과 자신을 비교한다. ‘나만 뒤처지는 게 아닐까’ 하는 FOMO(소외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증세는 현대인의 새로운 역병이 되었다.


이 역병은 삶의 본질을 처참하게 왜곡시킨다. 음식은 이제 허기를 달래고 생명을 유지해 주는 감사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SNS 위에서 타인의 부러움을 사기 위한 ‘전시용 소품’으로 전락했다. 몸을 보호하고 추위를 막아주던 옷은 자아를 과시하기 위한 고가 브랜드의 각축장이 되었고, 고단한 하루 끝에 안식을 주어야 할 집은 부동산 계급 전쟁의 전리품이 되어 우리를 밤낮없이 불안하게 만든다.


인간은 겉으로 밝고 양심적인 척 연기하는 데 능숙하다. 하지만 그 화려한 분칠을 한 꺼풀만 벗겨내면, 그 안에는 탐욕이라는 괴물이 아리를 틀고 있다. 나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이토록 추악하게 발현시키는 그 알 수 없는 근원적 에너지에 강한 반항심을 느낀다. 만약 이 세상이 고도로 설계된 시뮬레이션이라면, 나는 이 조악한 게임의 룰을 거부하는 ‘불량 유저’가 되기로 결심했다.


나는 인간을 혐오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을 인간답지 못하게 만드는 이 거대한 시스템과, 그 시스템의 부속품으로 전락해 버린 ‘종(種)’으로서의 인간을 거부하는 것이다. 오늘도 나는 스마트폰 속에 머리를 처박고 중앙선을 넘어오는 좀비들을 지나치며, 텅 빈 내면의 평온을 향해 고독한 발걸음을 옮긴다. 이 디스토피아에서 깨어있는 유일한 방법은, 역설적이게도 이 미친 경쟁의 대열에서 스스로 이탈하는 것뿐임을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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