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의 태생도 계급사회였고 노예가 필요했다.
2020.10.05
노예들의 희생으로 유지한 그리스의 부
우리에게 알려진 페르시아와의 전쟁이외에도
그리스는 폴리스들의 세력다툼으로 크고 작은 전투가 이어졌다.
단순한 스포츠경기가 아닌 전투에서는 승부가 갈린다.
승리한 폴리스는 패배한 폴리스의 시민들을 노예로 삼았다.
그리스 대부분의 폴리스가
늘어나는 인구의 부양을 위해 바다로 나아가 식민지를 개척하기 위해 노력하던 시절에
스파르타의 선택은 타이게토스(Taigetos)산맥 너머에 있는 메세니아(Messenia)로 가는 것이었다.
비옥한 토지에서 풍요롭게 살던 메세니아는 스파르타에 정복당하고 노예로 전락했다.
스파르타에 그들의 풍요도 빼앗겼다.
‘헤일로타이’라고 불리게 되는 노예들은 다른 폴리스와 다르게 폴리스가 직접 통제했는데
모든 위험한 일은 그들이 담당했었다.
전체인구의 80%를 차지하던 메세니아인을 통제하기 위해
스파르타의 시민은 군인의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스파르타인보다 훨씬 많은 그들을 통제하려면 막강한 군사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런 필요성 때문에 스파르타인은
어렸을 때부터 남녀 모두 강하게 키위질 수밖에 없었고
스파르타의 모든 시민은 그렇게 군인이 됐다.
아테네의 경우처럼 돈을 갚지 못해 인신매매가 되는 경우도 있었고
돈을 벌기위해 자발적으로 노예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강력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에게해’와 ‘동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한 아테네는 주로 전쟁에서 승리한 전리품인 포로를 노예로 삼았다.
그리스 전체가 뭉쳐서 페르시아를 상대로 이뤄낸 승리였다.
전쟁의 규모만큼이나 전리품인 노예의 수도 많아
전쟁에 참여한 여러 폴리스에게 상당한 수의 노예가 주어졌다.
폴리스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노예들은 시민만이 참여할 수 있는 군인과 정치를 제외한 모든 분야에서 활동했다.
매춘을 비롯해 올리브농사와 포도농사 같이 일손이 많이 필요한 곳에 투입되었다.
일부 숙련된 노예들은 도자기를 만들거나
전투 장비인 갑옷과 방패, 창, 검을 만드는 일에도 관여를 했다.
해상교역 같은 상업에 종사하는 시민일 경우
갤리선에서 노를 저을 노예가 필요했기 때문에 100여명이 넘게 노예를 거느리기도 했다.
다른 폴리스들에 비해 아테네는 은이 채굴되는 광산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채굴에는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주로 노예들이 투입되어 그 일을 담당하게 된다.
대규모로 이뤄진 노예의 노동으로 인해 꾸준한 공급이 필요했고
노예만 취급하는 노예거상도 등장하게 된다.
아테네와 시민들은 라우리온 은광을 비롯한 여러 은광에서 이뤄진
노예들의 수고 덕분에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시민 대부분은 노예의 유지비용 때문에
최소 1~2명에서 10명 안쪽으로 유지했다.
노예도 사람이라서 먹고 입어야했기 때문이다.
노예 중에는 상업이나 금융업에서 재능을 발휘해
자유를 얻고 지주나 거상으로 성장한 경우도 있었다.
민주주의를 태동했다고 알려진 아테네마저도
전체인구의 1/3이 노예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결국 전체 국민에게 주어지는
투표권이 만든 오늘날의 민주주의보다는
노동과 생산을 담당하는 노예제가 밑바탕에 유지되었기 때문에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노예제가 없었다면
그리스와 아테네는 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의 발전에 많은 제한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속도도 느렸을 것이다.
노예제는 나중에 노예상인들의 노예무역 규모가 커져
노예의 가격이 저렴했기 때문에 부리는데 부담이 줄어들었다.
당장의 생산을 위해 필요한 노동력 제공에는 편리한 장점이 있었지만
기술발전을 더디게 하는 부작용도 공존했다.
노예제가 로마시대까지 이어지지만 비용의 효율성이 떨어져 변화를 겪는다.
노예제는 다치거나 아플 위험이 있어 안전하지는 않았지만
해상교역에 돈을 빌려줘 손실을 보는 것보다 안전했다.
당시 그리스는
자신들이 장악한 에게해의 해상패권을 기반으로 선순환이 된 노예제로
생산과 채굴을 하는데 지대한 도움이 얻는다.
노예제와 해상패권은
그리스가 부를 이루고 유지하는데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요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