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파냐에서 잉글랜드로 움직인 부(富)

by 필립일세

부는 에스파냐에서 잉글랜드로 움직였다.





아메리카의 식민지를 경영하며 무역을 통해 이익을 독점하던 에스파냐는 강력한 해군력을 유지하며 대서양과 지중해에서 명성을 떨쳤다. 유럽의 방파제 역할을 하던 비잔틴제국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자 소아시아와 북아프리카를 장악한 오스만 튀르크는 지중해에도 진출한다. 해상에서 유럽과 이슬람의 크고 작은 이해충돌이 잦아졌고 갈등도 커져갔다. 키프로스에서 시작된 전투로 갈등은 표면화되고 레판토해전까지 이어졌다. 여기에서 유럽의 신성동맹의 승리를 이끈 에스파냐는 위상은 높아졌지만 해전에 들어간 비용과 식민지였던 네덜란드가 일으킨 독립전쟁을 진압하는데 들어가는 비용까지 겹쳐 경제적으로는 파산상태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게릴라 전술로 에스파냐 무역선을 약탈하던 해적이 골칫거리였는데 그 뒤에는 잉글랜드 왕실이 있었다. 국가전체 수입이 도시국가였던 밀라노보다 적을 정도로 경제난이 심각했던 잉글랜드에게 신대륙에서 막대한 재화를 가득 채워오는 에스파냐 무역선은 탐낼 만한 존재였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프랜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다. 해적질을 너무나도 잘한 나머지 엘리자베스 1세에게 작위와 훈장을 받은 인물로 여왕은 그에게 합법적으로 외국배에 한해 해적질을 할 수 있는 사략을 허락하게 된다. 사략은 당시 유럽 국가에서 흔하게 발급하던 공식적인 해상약탈면허다. 개인전함으로도 불렸던 사략선을 이용해 다른 나라의 무역선에 실린 재화를 약탈했다. 신대륙과의 무역으로 가장 활발한 해상활동을 하던 에스파냐의 무역선은 여러 나라의 표적이 되었는데 특히 잉글랜드의 사략질로 많은 피해를 보게 되었다. 잉글랜드왕실은 사략으로 얻은 이익으로 재정난을 메우는데 활용했고 암묵적으로 장려하며 일종의 산업처럼 육성하고 있었다. 드레이크 외에 많은 사략선장이 왕실로부터 작위를 수여받을 정도였다.






자국의 상선의 피해가 계속되자 에스파냐는 잉글랜드에게 몇 차례 문제해결을 요구하고 경고를 했지만 의례적으로 답변만 돌아왔을 뿐 적극적인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도발이 심해졌다. 더 이상의 기대를 버리고 직접 해결하기로 마음먹은 에스파냐는 잉글랜드를 공격하기 위해 전함과 상선을 끌어 모은다. 에스파냐가 모든 국력을 모아 준비했던 것과는 달리 가난한나라 잉글랜드 해군은 열세를 만회하려고 사략선과 연합전력을 구축했지만 극복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우리가 알다시피 잉글랜드는 에스파냐 해군에게 승리한다. 1588년 8월 8일 도버해협에서 있었던 잉글랜드와 에스파냐의 명운이 갈린 이 해전을 서양사에서는 칼레해전(Naval Battle of Calais, Batalla de Calais)이라고 부른다. 칼레해전은 단순한 두 나라의 전쟁을 넘어 부(富)와 경제사에 있어 거대한 흐름이 변화한 전투다. 잉글랜드는 에스파냐 함대를 무적함대라고 칭하며 에스파냐를 이긴 잉글랜드가 더 강하다는 것을 부각시키며 조롱했다.






잉글랜드의 버릇을 고쳐주려던 에스파냐는 막강한 전투력을 자랑했던 전함과 대규모의 선단을 잃으며 쇠락하기 시작했다. 이후에도 계속된 잉글랜드 원정에서 패배하고 후유증으로 재정난에 시달리지만 아메리카식민지에서 들어오는 풍부한 물자와 부(富)로 인해 버틸 수 있었다.






자신감을 얻은 잉글랜드는 이후 해상교역에 집중하게 되면서 해군을 육성하게 되고 1600년 12월 31일에 아시아지역 무역에 독점권을 부여한 동인도회사를 설립하게 된다. 잉글랜드 동인도회사는 한때 우방이었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와 경쟁에서 승리하며 인도를 차지하고 아시아로 가는 길목이었던 아프리카대륙에 식민지를 건설하는 등 왕성한 해상활동을 펼쳤다. 박해를 피해 청교도들이 북아메리카로 이주하자 잉글랜드는 이들을 중심으로 아메리카에 식민지를 개척했다. 식민지에서 생산된 재화는 저렴하게 사들이고 잉글랜드의 생산품을 비싸게 팔아 많은 차익을 남기며 잉글랜드는 부강해졌다. 이후 잉글랜드는 ‘해가지지 않는 대영제국’이라는 이름을 얻으며 전 세계 바다를 누볐고 유럽을 넘어 한동안 세계의 중심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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