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전능한 쇠붙이의 도시 세비야
‘모든’ 아이디어는 쇠붙이에서 나온다(All' idea di quel metallo)’로 직역되는 문장에서 쇠붙이는 돈을 가리킨다. 돈이 모든 재화교환에 중심이 되면서 지혜, 생각, 아이디어같이 값어치 판단이 애매한 무형의 재화마저 이끌어낼 정도로 강한 동기부여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문장은 로시니가 작곡한 ‘세비야의 이발사’에 나오는 가사다. 지극히 물질적인 이 표현은 당시 세비야라는 곳이 얼마나 물질만능주의 색채를 뗬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재화를 돈으로 사고파는 것도 모자라 사람의 조언과 아이디어까지 팔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레콩키스타로 그라나다가 무너지고 이베리아반도가 통일된다. 지금의 안달루시아지역은 이때 수복된 곳으로 그라나다와 세비야 코르도바라는 중심도시가 있다.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 1세와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2세 부부는 레콩키스타의 상징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그라나다를 수도로 정했다. 이 무렵 신대륙을 발견하겠다는 꿈을 가진 이가 있었다. 이곳에서 부부왕은 후원자를 찾아 유럽을 떠돌며 꿈을 이루려고 했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를 만나 후원을 약속하게 된다. 이 약속으로 에스파냐는 유럽의 변방에서 유럽을 이끄는 중심축을 담당하게 된다.
에스파냐 남쪽의 항구도시인 세비야는 지중해 무역의 중요성이 낮아지고 새로운 항로개척을 통해 부각된 대항해시대의 수혜를 받은 도시다. 콜럼버스가 1492년부터 1503년 까지 10여 년간의 항해로 신대륙을 개척하면서 시작된 신대륙과의 교역은 에스파냐에 많은 경제적 이익을 제공했다. 이때 신대륙과 교역에 있어 모든 배는 세비야를 거치도록 법령을 만들었기 때문에 세비야는 독점적인 지위를 누렸다. 세비야에는 많은 물자가 흘러들어와 부(富)와 기회를 잡으려는 사람들은 모여들었고 이중에는 새로운 곳을 탐험하려는 호기심이 많은 이들도 있었다.
신대륙에서 아즈텍과 잉카를 무너뜨리고 식민지가 확장되면서 확보한 노동력 덕분에 적은 비용으로 카리브 일대와 신대륙에서 농산품과 금과 은 같은 광물을 얻을 수 있었다. 감자와 옥수수 같은 신생 작물은 에스파냐의 먹거리를 해결해 경제를 넘어 유럽 대륙의 인구가 유지되는데 도움이 되었다. 세비야를 통해 들어오기 시작한 카카오와 설탕역시 유럽 곳곳으로 수출되어 이로 발생한 많은 이윤은 에스파냐의 재정을 견고히 하는데 이바지했다.
왕실은 농산물의 거래로 벌어들인 자금과 금과 은으로 확보한 재정은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해군력 확충으로 연결되어 에스파냐가 지중해 일대와 유럽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계기가 된다. 가톨릭국가였던 에스파냐는 세비야의 국제성은 물론이고 세비야 성장과 발전을 보여주기 위해 새로운 상징을 만들 계획을 세우게 되는데 그 결과물이 바로 세비야 대성당이다.
에스파냐는 자신들의 국력과 재정능력을 온 유럽에 자랑하기 위해 당대 세계 최고의 성당을 지으려고 했다. 규모역시 엄청나서 첫 삽을 뜬 지 100여 년이 지난 시점인 1506년에서야 완공된 성당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앞서 언급한대로 이때 모여든 예술가들이 그려낸 세비야의 다양한 삶의 모습은 지금도 문학과 미술, 음악작품을 통해 경험할 수 있다.
에스파냐와 세비야에 이런 부귀영화를 가져다준 콜럼버스이지만 정작 에스파냐에게서는 버림받게 된다. 배신감을 느낀 콜럼버스는 죽어서도 에스파냐의 땅을 밟고 싶지 않아 히스파니올라섬에 묻어달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이후 이곳을 프랑스가 점령하면서 그의 유해는 쿠바를 거쳐 세비야로 옮기는데 유언대로 에스파냐의 땅을 밟지 않게 하려는 후세사람들의 아이디어로 왕들을 상징하는 조형물이 그의 유해가 들어있는 관을 어깨에 메도록 만들었다.
콜럼버스에게 진 마음의 빚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게 해준다. 인재를 알아보는 눈썰미와 약속하나로 시작된 부(富)는 에스파냐가 지금의 생명을 유지하는 기반이 되었다. 이때 만들어진 세비야가 누렸던 번영의 흔적은 지금도 관광자원으로 활용되며 에스파냐의 먹거리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