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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립일세 May 18. 2022

세계문화유산이 될 뻔 했던 대한민국

우리의 술문화는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을 수 없다. 

유네스코에 문화재로 등록될 수 있었던 대한민국의 술 문화     






 유엔 산하에 있는 유네스코는 우리나라의 문화재를 발굴하고 관리하는 문화재청처럼 전 세계에 있는 문화와 관련된 유물과 문화재를 발굴하고 보존하기 위해 ’유네스코 문화재‘로 지정하는 단체다. 그중에는 우리나라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기록유산을 비롯해 유형, 무형의 문화재가 선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그중에 술과 관련한 문화도 포함됐다. 그 주인공은 와인으로 유명한 프랑스나 위스키와 에일로 유명한 잉글랜드, 비어로 유명한 도이치도 아닌 벨기에다.






 어떤 국가도 술로 인해 나라전체가 문화재로 인정받은 사례는 없었다. 그래서 벨기에가 비어와 관련해 나라전체가 문화재로 인정받은 사례는 특이할 만하다. 벨기에 비어가 다른 나라들과 차별된 점은 비어가 벨기에 국민들의 일상생활에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나라전체를 문화재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벨기에의 비어문화(Beer culture in Belgium)는 2016년 우리나라의 제주해녀문화와 같이 유네스코 무형문화재로 등록되었다. 벨기에 국민이 속한 여러 공동체 일상에서 비어의 역할과 기여를 인정한 것이다. 술을 마시는 비어가 아니라 일상을 즐기는 음료로 받아들이고 있다. 비어를 판매하는 일반 카페나 레스토랑에서뿐만 아니라 각 종류에 맞는 비어를 즐기기 위해 일반 가정에서마저 종류별로 잔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비어를 즐기는 수준이 이와 같다 보니 유네스코는 비어와 관련된 벨기에 문화가 보존될 가치가 있다는 판단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결혼식 같은 집안행사나 마을 축제같이 공동행사가 있을 때 주민이 모여 행사에 사용할 비어를 공동주조하면서 찾아오는 외부인도 같이 즐길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주로 주조장에서 만든 비어를 사서 마시는 도이치나 잉글랜드를 비롯한 다른 유럽 국가에서는 지역축제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이다. 비어를 만드는 작업이 단순하게 취하기 위한 술을 만드는 게 아닌 공동체의 협동과 화합을 끌어내는 역할까지 담당하는 모습은 벨기에만의 차별화된 요소이다. 






 이런 문화가 우리에게도 있었다. 우리의 문화와 역사가 동면을 취했던 일제강점기동안 우리의 술 문화가 짓밟히지만 않았다면 지금과 달리 과하지 않으면서도 화려한 술 문화를 유지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필자는 감히 예상해 본다. 우리의 술에도 벨기에 비어 못지않은 공동체적인 요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은 왕의 나라가 아닌 사대부의 나라였다. 왕이 하고 싶은 일이라 해도 사대부가 상소로 임금의 뜻을 막았고 이들의 힘을 견제하려다 왕의 아들이 죽어야하는 사건이 공식·비공식적으로 있었다. 이런 사대부의 힘은 광대한 농지를 보유하면서 시작되었다. 먹고 사는 게 중요했던 시대에 쌀은 곧 돈이었다. 쌀이 생산되는 토지는 해마다 쌀을 생산하는 화수분이었고 이를 위해 노동력이 필요했다. 농지에는 노비와 머슴, 소작농 같은 노동력이 있었다. 이들이 힘을 쓸 수 있도록 배불리 먹이는 과정에서 밥과 함께 술이 등장한다. 






 그들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는 금주령이라는 단어가 나왔을 때 연상되는 임금인 영조가 사대부는 술을 마시지 못하도록 하면서도 힘든 일을 하는 농부와 군인이 마시는 술은 예외로 하여 마실 수 있도록 했다는 점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금주령의 임금마저 백성을 위한 술은 예외로 했던 나라 조선의 술 문화는 조선이라는 나라가 사회가 유지되는 내내 계속되었다. 이런 전통이 이어지던 조선의 술 문화도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고 일제의 통감 통치라는계기로 변질되기 시작한다. 






 일제는 제한된 '자가 주조'를 허락하기 위한 면허를 신청을 받았다. 이때 면허를 발급받은 사람이 약 25만여 명이다. 전화는커녕 시장도 가끔 열리던 시절에 면처를 신청한 사람의 숫자가 25만여 명이었다면... 제대로 소식이 전해져 면허신청을 받았다면 10배는 더 많았을 것이라고 감히 예상해 본다. 소식이 전해지지 못해 미처 면허를 받지 못한 사람들은 술을 빚을 수 없었다. 면허가 신규로 발급되지도 않았고 기존면허자의 면허도 자손에게 상속되지 않았다. 즉, 면허를 받은 사람이 죽으면 술을 못 빚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마지막 면허자가 사망하면서 그렇게 1936년 이후 우리 땅에 있는 집안에서 술을 빚는 명맥은 '공식적'으로 끊어졌다. 






 광복 후 오랜 시간이 흘러 자가 주조가 가능해졌지만 집집마다 내려오던 술 빚는 풍습이 사라져 지금은 사먹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일제의 의도대로 변한 것이다. 나라는 광복을 맞았지만 술은 아직도 일제의 영향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도시화와 개인주의가 일반화되어버린 우리사회가 공동체로 다시 나아가기 위한 첫걸음을 공동주조로 시작해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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