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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립일세 Jun 13. 2023

Pub에서 기획된 하벨의 벨벳 혁명

Pub에서 기획된 하벨의 벨벳 혁명   





   

 1968년 1월 5일 공산당 치하의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슬로바키아의 제1서기 알렉산데르 두브체크(Alexander Dubček, 이하 두브체크)가 체코슬로바키아의 제1서기에 선출된다. 그는 같은 해 3월부터 언론검열을 폐기하고 언론‧출판‧표현의 자유를 인정하였다. 투옥되었던 유명 인사들에 대한 석방은 물론 그들의 활동에도 제약을 두지 않았다. 4월에는 공산당의 권력 독점을 포기하는 발표를 하였다. 이데올로기로 갈라진 냉전 상태에서 발생한 ‘프라하의 봄’이었다. 






 에밀 자토펙(육상선수), 밀란쿤데라(소설가) 등의 유명인은 물론 체코슬로바키아 각계각층이 민주화 개혁에 동참했다. 공산 진영을 이끌던 당시 소비에트 연방(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 이하 소련)은 공산 세력의 균열을 우려해 바르샤바 조약 회원국들과 공동 대응을 준비했다. 당시 프라하에는 1959년 군복무를 마치고 프라하의 극장에서 극작가로 활동하며 여러 편의 극을 발표해 유명세를 얻어가던 바츨라프 하벨(Václav Havel, 이하 하벨)도 있었다. 






  바르샤바 조약의 회원국이던 불가리아, 폴란드, 헝가리와 함께 25만 명의 병력과 전차(약 2천여 대)와 항공기(약 8백여 편)를 포함한 장갑차, 차량 등을 동원하여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8월 20~21일)하는 작전을 전개한다. 유혈사태를 우려한 두브체크 등의 지도부는 국민과 군에게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한 소련군을 포함한 바르샤바 조약군에 대항하지 않도록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체코슬로바키아에는 소련의 지지를 받는 새로운 정부가 구성됐다. 이때 침공을 체코슬로바키아 국민에게 알린 ‘자유 체코슬로바키아 라디오’에 동참했던 하벨은 당시의 활동이 이력에 남게 되었다. 새로운 정부가 그를 위험인물로 낙인찍어 활동을 감시하기 시작하자 극작가로서의 활동에도 제약이 생겼다. 정부를 비판하기를 멈추지 않던 하벨의 모든 작품은 공연금지를 당했다. 이는 하벨의 인생을 바꾸는 역할을 했다. 그의 작품에 대한 해외에서의 높은 평가는 그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설 수 있는 자리를 더욱 좁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탄압은 하벨이 더욱 활발한 민주화운동을 하게 만드는 동력으로 작용했지만 작품에 대한 열정도 계속 이어졌다. 하벨은 1974년 프라하에서 트루트노프(Trutnov)로 이주한다, 그곳에 있는 크라코노스 비어주조장(Pivovar Krakonoš)에서 9개월간 일했다. 추운 겨울에도 그는 술이 담긴 200㎏이 훌쩍 넘는 오크통을 옮기는 일을 했다. 온몸이 힘들었지만 육체노동은 하벨에게 행복감을 주었다. 육체적인 노동이 고될수록 공산당으로부터 받는 핍박과 고난을 잠시라도 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힘든 육체적인 노동에서 얻은 경험은 새로운 소재로 작용해 창작욕구를 불러일으켰다. 하벨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던 공산당은 주조장에 압력을 행사해서 하벨이 주조장에서 일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주조장을 나와야 했다. 






 그렇지만 하벨은 이때 쌓은 양조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두 사람 간 대화로만 진행되는 ‘청중(Audience, 1975)’이라는 극본을 쓰기도 한다. 그는 일관되게 권력의 위선과 관료주의가 만들어내는 부조리와 의사불통 같은 정치적인 메시지를 담은 희곡을 썼다. 

 1977년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는 지식인들이 모여 만든 ‘카르타(Charta)77(77헌장)’에 가입하였다. 주요 인물이었던 그는 본격적으로 민주화운동에 참여하여 정치 개혁을 촉구한다. 이로 인한 탄압으로 1979년~1983년까지 투옥되기도 한다. 하벨의 이런 민주화 활동은 시간이 갈수록 그를 거인으로 만들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이 끝난 지 1년여 뒤 1989년 11월 10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일주일 뒤 17일부터 체코의 프라하와 슬로바키아의 브라티슬라바를 중심으로 학생과 시민의 시위가 이어졌고 20일에 프라하의 바츨라프 광장에서 비폭력 반정부 시위가 약 20여 만 명이 참여한 가운데 계속되었다. 24일 공산당 서기장 자리에서 사임했다.






 시위는 계속되어 25일은 약 80만 명이 참여했다. 소련의 지지를 받으며 정치 개혁을 거부하던 공산 정권은 대규모 비폭력‧무혈 시위에 굴복한다. 이게 바로 벨벳 혁명(신사 혁명)이다. 28일 공산당은 국민에게 다당제 도입을 포함한 정치 개혁을 선언하고 12월 10일 구스타프 후사크(Gustáv Husák)대통령까지 사임한다. 이때 ‘프라하의 봄’때 소련으로부터 축출당했던 두브체크와 시민운동으로 이름이 높았던 하벨이 여론의 주목을 받았다. 28일 두브체크는 연방 의회의 의장으로 정계에 공식적으로 복귀하였고 29일 하벨은 대통령직을 맡게 된다. 1990년 6월에 선거를 치르면서 공산정권이 막을 내렸고 거친 풍랑을 거쳤던 벨벳 혁명도 성공적인 결말을 맺는다. 이후 1994년 1월 11일 체코의 초대 대통령인 하벨과 USA 대통령이던 빌 클린턴이 체코프라하에서 만나 정상회담을 했다. 그들의 회담은 프라하의 비어 펍 중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된 ‘우 즐라테호 티그라(U Zlateho TYGRA, 황금 호랑이)’에서 진행됐다. 하벨의 단골이던 곳으로 ‘벨벳혁명’을 준비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어 체코 민주주의의 상징적인 장소다. 






 하벨과 함께 슈니첼(도이치식 소고기 튀김), 체코의 비어를 마시던 클린턴은 프라하의 봄이 한창 유럽에 알려졌을 무렵 잉글랜드의 옥스퍼드에서 유학 중이었기에 보다 가까이에서 당시의 분위기를 느낀 인물이었다. 이후 하벨은 해외에서 정치‧경제‧사회‧문화 등의 주요 인사가 왔을 때 그들과 체코의 비어를 나누며 그들과 교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에게 일반적으로 알려진 비어 강국은 도이치지만 사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비어를 마시는 곳은 체코다. 2020년 기준으로 1인당 비어 소비량은 체코(181.9ℓ)가 압도적인 1위다. 그 뒤를 오스트리아(96.8ℓ), 폴란드(96.1ℓ), 루마니아(95.2ℓ), 도이치(92.4ℓ)가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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