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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립일세 Jun 15. 2023

아직도 일본에 맞서 독립 운동을 하는 홍길동의 나라

류큐(유구국, 일명 오키나와)

아직도 독립 운동을 하는 홍길동의 나라 류큐(유구국)    





 

류큐 – 홍길동이 간 율도국     






 우리나라 흔히 들리는 주민센터나 여러 관공서의 민원실에서 작성할 서류의 예문으로 많이 사용되는 이름이 홍길동이다. 그는 홍길동전에서 새로운 유토피아인 율도국을 찾아 자신을 따르는 무리를 배에 태우고 바다로 향한다. 지어낸 이야기로 취급될 수 있지만 현실을 반영한 사실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반영된 현실을 감안해서 율도국에 대한 갑론을박은 구준히 제기되었었다. 율도국의 후보지로 가장 유력하게 지목되는 곳이 오키나와로 불리는 류큐 지역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유구(琉球)라는 명칭으로 기록되었다. 왜구와 같은 여러 차례 침략으로만 일관하던 일본과는 달리 한때 조선을 형제의 국가로 말하며 스스로 동생을 자처했던 류큐는 지리적으로 가까웠던 일본을 멀리했고 그 다음으로 가까웠던 명나라보다도 조선을 우선시했다. 이에 조선도 류큐를 가까이하며 서로 우애좋은 형제의 나라로 지냈다. 류큐는 일본의 조선 침략에 대해서도 명나라에 미리 알려 조선에 원군을 보내는 밑바탕을 만들었고 일본이 필요했던 물자 징발에도 소극적으로 임해 훗날 왜란이 마무리되자 일본의 침략을 받게 되는 불운의 역사를 가지게 되는 나라다. 






 1598년 12월 조선침략의 실패로 일본국은 혼란을 겪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상태에서 그의 추종세력인 서군과 도쿠가와 이에야스(이하 이에야스) 추종세력인 동군간의 다툼은 이에야스의 승리로 끝난다. 이에야스는 1603년에 세이이다이쇼군(征夷大将軍)에 오르고 에도에 막부를 설치 후 나라를 통치하게 된다. 큐슈의 남부 가고시마현 위치에 있던 사쓰마 번의 시미즈 가문은 서군에 참여했다가 패전하지만 이에야스의 배려로 다스리던 영지를 계속 다스릴 수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1608년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고 힘을 회복한 사쓰마는 류큐에 에도막부를 대신해 교류를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1609년 3월 초 80척의 선박에 3천여 명의 군대를 싣고 류큐를 침략한다. 차례대로 여러 섬을 점령하였다. 결국 본토인 니키진의 슈리성까지 점령한다. 결국 류큐왕은 사쓰마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고 이에야스를 이어 다이쇼군이 된 히데타다를 알현하기 위해 에도까지 끌려가는 치욕을 겪는다. 






 침략을 당한 류큐는 사쓰마에게 식량을 비롯한 각종 무기와 보물들을 빼앗기게 된다. 이 때 사쓰마가 전리품으로 가져가는 물품 중에 하나가 바로 ‘포성’이라고 불리는 아와모리 소주였다. 포성은 거품이 있다는 뜻으로 일본에 편입된 상태라서 일본소주로 불리지만 엄연히 일본과 만드는 방식이 다른 류큐의 증류 방식이었다. 우리나라와 일본의 술빚기와 다르게 쌀 없이 물과 누룩으로만 발효해서 얻은 술로 증류를 하는 것이 특징이다. 증류기술을 타이로부터 받아들인 탓에 안남미에 아와모리의 흑국균을 배양한 누룩과 물을 섞어 발효시킨 후에 나무증류기로 소주를 만들었다. 주로 알코올 도수가 40%이상으로 생산되고 지금은 전체 성분이 3년 이상 숙성된 술을 코슈(古酒)라고 부른다. 술을 잘 못 마시는 일본인들이 아와모리 소주를 즐기기 위해 기호에 따라 차(tea)와 얼음, 음료, 물을 넣어 마시는데 계절에 따라 물의 온도를 조절해서 넣고 ‘시쿠와사’라고 불리는 류큐 지역의 레몬을 넣어 마시기도 한다.






 오키나와라 불리는 이와같이 이웃 국가의 횡포에 시달리던 나라였다. 왜라고 불리던 일본은 원래 본토인 혼슈, 방석처럼 생긴 시코쿠, 발부분인 큐슈 등 3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명치유신이후에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를 핑계로 아이누족을 짓밟아 홋카이도라 했고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류큐를 침략해 프랑스, 네덜란드, 아메리카와의 외교단절을 요구하고 포고령을 내려 오키나와로 불렀다. 태평양전쟁 막바지에 본토의 피해를 막기 위해 오키나와에 방어선을 구축한 일본으로 인해 연합군과 100일간의 전투에서 오키나와는 양조장을 비롯한 모든 게 파괴되지만 다행히 곧바로 흑국을 복원해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조선은 광복을 맞이하지만 아이누와 류큐는 그렇지 못했다. 두 지역은 지금도 보이지 않는 차별을 받고 있다. 아이누족은 차별을 피하려고 자신들이 아이누라는 것을 숨기며 철저히 일본화가 되어가는 반면 광복에 대한 의지가 살아있던 류큐는 전략적으로 중요했던 탓에 미군이 통치했다. 일본으로부터 독립하지 못한 류큐는 1972년 5월 15일부터 일본에게 다시 지배받으며 지금의 후텐마 기지와 같은 문제들로 일본 정부와 마찰을 빚고 있다. 지금도 류큐 왕국의 후손임을 내세우며 일본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단체를 조직하고 오키나와가 아닌 류큐로 다시 일어서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자칫 우리의 모습일 수도 있었던 류큐의 모습을 통해서 독립 국가를 유지하고 있는 우리가 다행임을 느끼면서도 최근 현 정부의 일본에 대한 자세가 친일(親日)을 넘어 부일(附日)의 행태에 가까워지는 거 같아 안타깝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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