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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립일세 Jul 01. 2023

개신교의 성장에 동력이 된 술-1

개신교의 성장을 거든 술-1   





  

 모든 일에는 돈이 필요하다. 평화로운 선거마저도 돈이 들어가고 광복을 위해서 활동했던 상해 임시정부에서도 돈이 필요했으며 가톨릭의 타락을 멀리하고자 일어선 개신교도 이단이 아닌 종교로 인정받기까지 많은 돈이 필요했다.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이하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내걸며 종교개혁의 서막을 알렸다고 알려져 있는 날짜다. 가톨릭이 지배하던 당시의 유럽에서 가톨릭에 대해 비판을 하고 변화를 부르짖는 것은 세상에 대한 도전이었고 기존 질서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렇기에 누구나 할 수 있는 평범한 일이 아니라 목숨을 내놓고 해야 하는 혁명가의 길이었다. 위험이 곳곳에 있었던 덕분에 뜻을 같이하는 사람을 만나기 어려웠고 뜻을 같이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지 못하는 경우가 다수였다. 루터가 오늘날까지 이름이 언급되는 이유는 이런 환경에서도 버티며 종교개혁 활동을 했기에 가능했다. 그가 이런 활동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경제적인 뒷받침이 필요했다. 






 거기다 그는 가족을 이끄는 가장이었다. 종교 자체에 대한 대의도 중요했지만 또 다른 방향에서 종교개혁을 봤을 때 성직자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는 것도 종교개혁을 상징하는 방향성의 한 갈래였다. 최초의 목사로 알려진 루터를 상징적인 환경으로 인도한 사람이 바로 카타리나 폰 보라(Katharina von Bora, 이하 보라)다. 1523년 루터의 도움으로 수녀원에서 탈출한 수녀 보라는 누구도 관심을 보이지 않던 노총각 루터에게 관심을 표명했고 그녀의 적극적인 구애와 협박(?)을 받던 루터는 그녀가 원하는 대로 결혼을 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운동에 일생을 바쳐가고 있었다면 보라는 루터 목사가 가정을 이루고 살아갈 수 있도록 희생한 여인이다. 종교계를 발칵 뒤집은 둘의 결혼은 유럽의 기존 질서에 던지는 파장이 컸다. 






 자신의 가족은 물론 남편 형제의 자식들까지 돌봐야 했던 살림에는 많은 돈이 필요했다. 거기에 루터는 이곳저곳을 다니며 종교개혁의 필요성을 알리러 다녔고 그를 지지하는 지지자들의 방문도 계속 이어졌다. 활동에 대한 경비와 방문객에 대해 접대까지도 해야 했다. 온갖 신경과 정신을 집중해 종교개혁을 하던 남편의 경제적인 뒷받침은 물론 가정의 살림까지 책임져야 했던 환경에서 사용되는 비용은 거의 그녀가 감당했고 그녀가 돈을 벌기 위해 했던 것은 술을 만드는 주조였다. 주조가 전부는 아니었지만 주로 주조로 벌어들인 돈으로 이 모든 것을 해냈다. 그녀의 이런 헌신이 있었기에 루터는 종교개혁 활동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런 밑바탕이 있었기에 개신교가 성장하여 이단의 오명을 벗고 오늘날 굳건한 위치를 만들 수 있었다.






  그녀가 주로 했던 주조는 곡식을 사용하는 비어였다. 그녀의 주조 솜씨도 훌륭했기에 비텐베르크는 물론 주변 지역에서 그녀가 만든 비어에 대한 수요가 많았다. 그녀가 만든 비어를 가장 많이 마신 이는 누구보다 루터였다. 그를 찾아온 동지들도 보라가 만든 비어를 마시면서 입소문은 자연스럽게 퍼질 수 있었다. 루터는 많은 이들에게 비어를 권했다. 웃기지만 술을 마시고 곯아떨어져야 잠을 잘 것이고 그래야 죄를 덜(?) 짓는다는 논리였다. 루터의 일화로 종교개혁을 부르짖을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참석했던 보름스 제국회의장에서 루터는 자신이 종교개혁을 하는 이유를 설명해야 했다. 당당히 나서 말해야 했음에도 황제를 비롯한 여러 귀족이 모여있어 너무나 긴장했던 나머지 비어 한 잔을 마시고 임했었다는 이야기는 개신교의 전설이다. 이렇듯 개신교의 밑바탕이 굳건해지는데 비어가 이바지한 바를 부인하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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