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주문화의 변화
3억 리터의 포도주. 헤아림의 범위를 벗어났다. 얼마나 되는 양일까? 시중에 판매되는 포도주 한 병에 담기는 양이 750ml다. 이를 기준으로 4억 병에 해당하는 분량이다. 이런 분량의 포도주가 지금 프랑스에서는 재고로 남아있다. 재고의 수는 줄지 않고 있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농업기술의 발달로 포도는 큰 변화 없이 꾸준히 생산되고 있다. 이에 따라 주조장에서 생산되는 포도주의 양에도 큰 변화가 없다. 결국 포도주의 재고가 증가한다는 것은 소비가 안 된다는 것이다. 주된 소비처인 유럽에서는 포도주를 마시는 사람의 수가 점점 줄고 있다. 마케팅과 브랜드 관리의 힘으로 여전히 고급술이라는 이미지를 아직 가지고 있지만 마시는 사람의 수가 줄다 보니 포도주를 만드는 일은 포도주의 나라 프랑스에서 사양산업으로 바뀌고 있다. 보르도와 부르고뉴, 론, 알자스 등의 포도주 주조장이 많은 도시에서는 포도주의 앞날에 대해 고민이 많다. 21세기에 들어 포도주 소비는 2007년 이후 꾸준히 하락 중이다.
대가족이 감소하고 1인 가구가 증가하면서 750ml의 포도주를 홀로 한 번에 전부 마시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더군다나 일반적인 포도주의 알코올 도수는 12~15% 사이로 높은 편이다. 최근 유럽에서는 알코올도수(4.5~5.5%)가 낮으면서도 한 병의 양(330~500ml)에 부담이 적은 비어의 소비량이 증가하고 있다. 이런 흐름은 우리나라에서도 이어졌었다. 물론 포도주와 위스키 같은 고가이면서 고도수 술에 대한 선호가 꾸준히 있는 추세지만 판매가격이 높은 술위주로 판매되다보니 판매액이 높은 것이지 실제 판매량이 급증한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건강을 위해 저도수 비어나 막걸리를 찾는 소비자의 선택도 꾸준하다. 특히 탁주로 분류되는 막걸리의 경우 소비량이 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높은 가격의 주류 소비가 늘어나는 것은 일시적인 현산일 수 있지만 건강을 생각하여 저도수의 술을 소비하는 이런 추세는 주류 소비의 흐름이기 때문에 한동안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는 직장이나 모임의 회식 같은 술자리에서 과음으로 건강을 해쳤던 일들이 줄어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코로나19가 확산되면서 면역력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깊어졌고 면역력을 떨어뜨리는 과음보다는 적절한 음주가 선호되었다. 거기에 값싼 재료로 만든 저렴한 술을 많이 마시기보다는 적게 마시더라도 좋은 재료를 사용하는 술을 마시려는 선호 현상도 뚜렷해졌다. 이런 소비의 변화는 규모의 경제를 추구하는 대형주조회사의 술보다 좋은 재료를 사용하는 중소규모의 주조장의 수가 증가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거기에 정부가 쌀을 비롯한 곡식의 소비를 늘리기 위해 전통 방식으로 만드는 술에 대해 기존의 여러 규제를 없애고 지역특산주나 온라인판매 같은 정책을 지속적으로 진행하면서 변화가 이어지며 확대되고 있다.
이런 모습들은 예전의 음주량이 많던 술자리의 폐해에서 벗어나 같이 자리한 사람과 음식을 나누며 술을 음미하는 방향으로 음주문화가 정착되어가고 있는 것을 알게 해주는 큰 변화라고 볼 수 있다. 주류의 소비가 많을수록 노동의 강도가 높은 사회라는 연구에서 알 수 있듯이 음주문화의 변화는 산업구조의 변화도 알 수 있게 한다. GDP의 성장과 함께 건강을 포함한 삶의 질에 대한 인식도 성장하면서 변하고 있는 음주문화는 우리 사회가 좀 더 발전하고 건강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