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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정원사 안나 Jun 10. 2020

퇴사후 내가 가장 먼저 한 것

인간 본성의 해부는 나로부터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 나는 사람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다시 알아보고 싶었다. 어릴 적 나는 내가 사람을 꽤 잘 안다고 생각했었고, 말하지 않는 상대방의 고충이나 입장도 잘 파악하여 깊이 헤아린다고 여겼다. 근데 이상하게도 직장생활을 오래 하면 할수록 드는 생각은 '아니네, 두 손 들어야겠다. 나는 사람을 전~혀 모르겠어'였다. 그리고 내가 상대를 이해할 수 없는 만큼 다른 사람들도 나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서로 소통을 위해서 말을 하지만 말을 할수록 더욱 소통에서 멀어지는 이상한 세계에 갇힌듯한 기분? 


배려를 하면 무시로 돌아오고, 친절히 대하는 것은 상대의 악랄함만 더 키우는 것 같았다. 유치원에서 배워왔던 인간관계의 기본 원칙은 모두 정 반대로 돌아가는 것만 같은 상황. 물론 회사 상황이 좋지 않았고, 사람들이 극도로 스트레스를 받았던 상황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말이다. 뭔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기존에 내가 가지고 있던 원칙들을 내려놓고 인간에 대해서 제대로 탐험을 해 보아야 했다. 



서점에 가보니 마침 베스트셀러로 '인간 본성의 법칙'이라는 책이 올라와 있었다. 벽돌 같이 보이는 두께였지만 나의 궁금증을 해소해줄 피 같은 정보들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니 그 두께가 전혀 부담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서문에 보니 그가 책을 쓴 이유도 내가 책을 집어 든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어디든 못된 인간들이 있고, 그것은 선진국이건 후진국이건 다를 바가 없나 보다. 로버트 그린은 인트로에서부터 나의 상처 난 마음을 토닥거려줬다.  


로버트 그린의 인간 본성의 법칙 - 인간행동과 심리에 관한 분석책이다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이런저런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중에는 일부러 분란을 일으키는 사람도 있고, 내 인생을 피곤하게 만드는 사람, 불쾌감을 주는 사람도 있다. 그는 내 상사나 리더일 수도 있고, 직장 동료나 친구일 수도 있다.


이런 험한 꼴을 나만 당하는 게 아니라는 것은 큰 안도감을 주었다. 몇 세기를 걸쳐 수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은 쇼펜하우어 조차도 이렇게 말했다.


뜻밖에 야비하고 어이없는 일을 당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거나 짜증 내지 마라. (...) 인간의 성격을 공부해가던 중에 고려해야 할 요소가 새로 하나 나타난 것뿐이다. 우연히 아주 특이한 광물 표본을 손에 넣은 광물학자와 같은 태도를 취하라.




어디 가서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회사를 다니는 내내 나는 '그들에게' '당하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자존심을 상하게 했고, 상당히 모욕적으로 느껴졌다. '인정머리 없는 몰지각한 인간'들은 나를 깎아내리고, 폄하하고, 무시했다. 그들은 소통이 되지 않았고, 선한 사람들을 괴롭혔으며, 무례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일부러 누군가를 조롱하고, 험담하는 그들은 한마디로 내 기준으로는 용납이 되지 않는 나쁜 인간들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런 사람들이 존재하는 사회생활에 좌절했다. (이 세상은 왜 이렇게 쓰레기인 것이냐며)  


회사를 그만뒀을 무렵 나는 직장생활에서 들은 온갖 부정적인 말로 자신감이 그야말로 바닥으로 떨어져 있었다. 오랜 회사생활은 정말 내가 어디에도 쓸모없는 인간인 것 같은 무기력감을 느끼게 해 주었다. 때문에 인트로에서 훌륭한 사람들이 나와 비슷한 경험을 했다고 이야기해 준 것은 실로 큰 위로가 되어 주었다. 그것은 결코 내가 못나서 당한 게 아니라고 속삭여 주었고, 풀이 죽어 있던 나의 기를 유일하게 살려 주었다. 위인들의 위로를 받고서 흡족한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면서 이들이 앞으로 얼마나 더 신랄하게 무뢰한들에 대해 비판을 해 줄지 생각하니 미리부터 기분이 짜릿해졌다. 그리고 한 챕터, 두 챕터를 넘기고...... 



기대감에서 펼쳐 든 첫 세 챕터에서의 이야기들은 내 뒤통수를 하~얗게 만들어 주었다.  




우리는 결코 자신을 자기도취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기도취는 유아인이 영화 '베테랑에서 연기하던 재벌 3세' 에게나 어울릴법한 단어라고 생각한다. 나는 합리적이고 상대를 존중할 줄 안다고 생각한다. 나는 남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고, 부당하게 남을 해하지도 않는다. 나는 결코 나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남을 짓밟지 않는다. 그런 내가 이 세상에 대해 존중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못 참아했던 것은, 이런 선한 나를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는 무지한 사람들에 대한 분노였다.


영화 베테랑속 배우 유아인
"심한 자기도취자들을 알아볼 수 있는 행동 패턴이 있다. 그들은 모욕을 당하거나 누가 도전해올 경우 방어책이 없다. 내면에서 그들을 달래주거나 그들의 가치를 인증해줄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엄청난 분노의 반응을 보이고, 복수심에 불타며, 자신은 죽어도 옳다고 생각한다. 그것 말고는 자신의 불안을 누그러뜨릴 방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 인간 본성의 법칙 by 로버트 그린


근데 이 문장이 이상했다. 눈을 비비고 여러 번 다시 읽어 보았다. 기묘하게도 여기서 묘사하는 자기도취자의 모습에서 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분명 강약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세상의 무례함에 대해 분노하고 어쩔 줄 몰라하는 것은 분명 나의 모습과 같았다. 아니, 이건 뭐지... 내가... 자기도취자??




생각해 보면 내가 왕도 아니고 재벌 3세도 아닌데 누군가가 나에게 비난을 하는 상황을 이렇게도 못 견뎌하고 못 받아들이는 것은 정상이었을까? 나도 누군가를 비판할 권리가 있듯이 그 누군가도 나를 비판할 권리가 있을 것이다. 만약 모든 사람이 다 나를 사랑해 주고 존중해 주고 있다면 상황이야 말로 비현실적일 것이다. 심지어 온 세상이 그의 편일 것 같은 오바마에게도 공개적으로 모욕적인 언사를 일삼는 트럼프가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인류를 위해 일생을 바친 위인도 아니고, 오류 투성이인 나를 비난하는 사람이 한 두 명 있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누군가 자신을 비난을 할 때 화가 나는 것은 정상이지만 건강한 멘탈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상황을 어떻게 대처할지에 대해 몰두해야 한다. 나를 공격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 자체에 분노하며 이런 상황이 잘못되었다고 좌절하는 것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정 하기에는 너무나 뼈아팠지만 저자가 말한 데로 나는 자존감이 없었기 때문에 나의 가치를 전적으로 상대의 평가에 의존했고, 그토록 비난을 못 견뎌했던 것 같다. 

Photo by Markus Spiske on Unsplash

내 편을 들어줄 것이라 기대했던 저자가 나부터 질책을 하니, 쏜살같이 책을 훑어 내려가던 눈동자의 움직임이 서서히 느려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챕터에서 나는 또 다른 고해성사를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상대방이 되어 보지 못했기에 그들이 경험하는 나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 우리는 대체로 '나는 맞다'라고 생각하고, '그들은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옳지 못하다'라고 생각했었는데, 과연 정말 그랬을까, 나는 윤리적으로 정말 전혀 결함이 없었을까? 일을 하다 보면 항상 팀별로 대치상황에 놓이게 되었고, 우리팀은 선한 의도로 '정당방위'를 하고 있다고 생각해 왔었는데, 정말 우리팀의 방어는 항상 '정당한' 것이었을까? 인간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을 재확인시켜줄 증거를 찾아내는 '확증 편향'이라는 편파적인 사고를 한다. 그리고 이런 편파적인 사고를 하는 이상 자신의 사고 과정에 오류가 있다는 사실은 죽었다 깨어나도 알기 어렵다.




제대로 된 인간 본성의 해부는 나 자신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했다. 세상은 3차원이고 입체적으로 돌아가는데 내가 적용하고 있었던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던 1차원적 시각에서 바라보는 인간관계였다. 여태까지 내가 끼고 있었던 렌즈는 바르지 않았다는 것을 처절하게 인정하고, 나는 새로운 안경을 써야했다. 제 3자의 입장에서 상황을 바라보고 객관적이고 균형 잡힌 시각을 갖추기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하지만, 성숙한 어른으로 건강한 사회생활을 하고 싶은 만큼 상황을 입체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키우는 것은 나에게 숙제로 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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