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음정원사 안나 Aug 07. 2020

회사에서 나답게 사는 것은 가능한가?

이제, 다름을 존중하는 사회가 필요하다  

나다운 것은 무엇일까? 나는 이것이 내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본질을 흩트리지 않고 존중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나답게 사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잘하는 것과 잘하지 못하는 것을 알고 내가 잘하지 못하는 부분은 인정하고 내려놓되 잘하는 부분에서 탄력을 받아 삶을 살아 나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스스로 타고나게 잘하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가지고 태어난다. 물론 노력을 통해서 누구나 어느 정도 능력을 끌어올릴 수는 있지만 타고난 것은 노력하지 않아도 쉽게 이루어지는 반면 타고나지 않은 것은 아주 힘겹게 노력을 기울어야 겨우 평균 수준으로 끌어올린다는 차이가 있다.


나에게 어려운 것이 누군가에게는 매우 쉽고 누군가에게 너무 어려운 것이 나에게는 매우 쉽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매우 재미난 일이다. 우리는 그 누구도 완벽하지 못하고 나의 부족함을 다른 사람을 통해서만 채울 수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잘하는 일로 누군가의 결핍을 채워줄 수 있기에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축복의 기회도 덤으로 얻은 셈이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서로 다른 재능으로 사회를 완성해 나가고 이렇게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 있기에 더욱 풍성해진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모여서 사회를 이루고 사는 이유이다. 이것을 멀리서 바라보면 퍼즐과 같다. 우리는 각자가 가지고 있는 모양이 다르고 각자의 위치가 다르기에 다른 퍼즐들과 맞추어서 전체 그림을 완성시킨다.


결혼할 때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자신과 가장 반대되는 성향의 사람을 짝으로 선택한다는 사실을 아는가? 진화론자들은 그것이 생존을 가장 높이는 방법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만큼 다양성은 삶을 살아가는 데에 서로를 살리는 방향으로 이롭게 작용한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조직인 가족 단위에서도 이렇게 다름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는데 여러 명이 모여 함께 일하는 사회는 오죽하랴. 여러 사람이 모였다는 것은 자체로 이미 그 안에 수많은 개성을 가진 다른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절대 똑같은 사람들만 100명 1000명이 있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사회는 얼마나 다양성을 존중해 주고, 우리는 다양성이 제공하는 수혜를 누리며 살고 있을까?


언젠가 외국인에게 웃지 못할 이야기를 들었는데 가을에 한국에 왔다가 여성들이 모두 똑같은 바바리코트를 입고 있어서 그것이 단체복인 줄 알았다는 것이었다. 청소년기를 지나 어른이 되면 보통 서로 비슷하게 보이고 싶어 하는 또래 집단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기 마련인데 우리는 어른이 되어서도 그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획일적인 문화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이 왠지 모르게 부끄럽게 여겨졌다. 우리 사회는 유독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 같다. 우리는 남들과 다른 것을 '특이하다', '이상하다'라고 생각한다.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같지 않은 것은 '잘못된' 것으로 여긴다.


내가 다닌 회사의 미국 본사에서는 직원들을 Specialist와 Generalist로 나누었다. Generalist는 여러 부서를 옮겨 다니며 회사의 곳곳을 파악하며 경영인으로서 커리어를 쌓는 사람이고 Specialist는 자신이 맡은 분야에 오랫동안 일하며 전문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한마디로 Generalist는 회사의 큰 그림을 보고 초고속 승진을 할 회사의 중역들을 길러내는 길이었고, Specialist들은 대체로 같은 자리에 머물며 오랜 시간 같은 일을 하며 여유로운 직장 생활을 해내가는 사람이었다. Generalist들은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대신 밤을 새 가며 회사에 헌신하며 살았고, Specialist 들은 일찍 퇴근해서 동료들과 같이 캠핑을 가거나 스포츠를 즐기는 등 행복한 일상을 지냈다. 물론 Specialist 들 중에서도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들이 당연히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이렇게 커리어가 나뉘는 것에 대해 사람들은 불만이 없었다. 각자가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자신에게 맞는 삶의 형태를 받아들이고 만족하며 살았다.


반면 우리나라는 어떤가? 우리는 CEO 가 될 덕목을 모두가 갖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회사에 헌신하며 최고의 인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날카롭게 분석하며, 빠르게 판단하며, 크게 볼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모든 사람의 능력을 판단하는 동일한 기준이며 본인 스스로가 그 기준에 못 미친다고 생각하면 자신을 자책한다. 설령 본인이 그런 기준을 자신에게 갖다 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동료와 상사로부터도 그런 능력을 갖출 것을 강요당한다. 그 결과 우리는 모두가 그 비슷한 모양의 사람이 되어서 회사생활을 하고 있다. 각기 다른 모양으로 퍼즐을 맞추어야 할 개성 있는 사람들이 똑같은 모양의 퍼즐로 변하여서 중간중간 빈 공간을 만들고 그림이 연결되지 않는 불완전한 모습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뾰족한 사람들만 잔뜩 모이면 서로를 찌를 뿐이다. 정작 퍼즐에서는 둥근 모서리가 필요하다는 것은 생각 못한 채 말이다. 기계가 돌아가려면 큰 톱니바퀴, 작은 톱니바퀴가 모두 필요하고 윤활유도 있어야 한다. 크게 보는 사람이 있으면 세밀하게 보는 사람도 있어야 하고, 빠르게 판단을 내리는 사람이 있다면 천천히 숙고하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 진지하게 임하는 사람도 있어야 하지만 웃기는 사람도 한 명쯤은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는 작은 톱니바퀴는 불량품으로 여기며 윤활유는 주인공이 아니기 때문에 하찮다고 생각하며 큰 톱니바퀴만 돌리고 있다. 기계가 삐걱대고, 마모가 빠르고, 부품이 자주 고장 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가끔 엄청난 히트를 친 드라마의 촬영을 끝내고 연예인들이 인터뷰하는 내용을 들어 보면 "현장 분위기가 너무 좋아서 역대 최고의 시청률이 나올 수 있었다." "팀워크가 좋았다"와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반대로 현장에서 트러블이 있었던 드라마는 여지없이 망했다. 아무리 최고의 감독, 최고의 배우가 모였다고 하더라도 서로를 배려하고 응원하는 친밀한 분위기가 형성되지 않으면 결코 그들의 합 이상의 결과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 나는 이런 분위기는 상호 존중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상호 존중은 다른 말로 다양성의 존중이다. 너와 내가 다름을 알고 우리를 하나의 기준으로 평가하지 않는 것. 그리고 그 각자가 제공해 줄 수 있는 그만의 재능을 인정해 주고 기쁜 마음으로 받아주는 것, 그것이 서로를 배려하는 사회에서 구성원들이 가져야 할 기본자세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회사생활이 왜 이렇게 끔찍한 것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내가 본질적으로 타고나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재능은 무시한 채 내가 가지지 못한 다른 무언가가 되기를 강요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행복해질 수 없다.




매거진의 이전글 권위적이지 않으나 권위 있는 리더가 되는 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