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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정원사 안나 Aug 10. 2020

내가 극혐 하는 그 사람이 사실 나와 닮았다면?

적은 나의 그림자다 

학창시절 마케팅에 대한 혐오

나는 어릴 적 생각이 많고 시니컬한 아이였던 것 같다. 사춘기 시절에는 혼자 세상을 바라보면서 이리저리 나름대로 해석해 보고 이해해 보려고 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극단적으로 말해 혐오하던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마케팅과 마케팅에 놀아나는(?) 사람들이었다. 대부분의 청소년들이 그렇겠지만 나도 미디어가 내뿜는 영향을 굉장히 많이 받고 자랐다. 1990년대 후반, 아이돌의 등장과 수많은 브랜드들의 탄생으로 우리는 그들이 쏟아내는 엄청난 광고에 노출되어 지대한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근데 나는 그것들이 굉장히 불편했다.


내가 보는 광고는 제품보다 훨씬 거대하게 부풀어진 환상을 심어주고 그것이 '행복한 것', '성공한 것', '잘 나가는 것'이라고 제멋대로 기준을 만들었다. 광고에 현혹된 사람들은 그 기준안에 들어가기 위해 무리하게 지출을 했고, 그 물건을 사지 못하면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자신의 행복을, 본인의 우월함을 물건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지 않은가. 나는 그 얇디얇은 천 조가리에 심어진 부풀어진 이야기를 사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제멋대로 행복과 불행의 선을 그어서 이리저리 몰려다니게 만드는 광고가 현대인들의 불행의 씨앗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마케팅을 혐오한다고 말하고 다녔다.



혐오는 지극한 관심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15년 뒤, 나는 내가 그토록 혐오하던 마케팅에서 일하게 된다. 극과 극은 서로 통한다고 했던가. 내가 마케팅에 보냈던 지독한 혐오가 지독한 관심이라는 것을 어느 순간 깨닫게 되었다. 멘토링을 통해 만나게 된 마케팅 상무님은 좋아 보이는 것, 화려해 보이는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니고 빡빡한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환상을 심어주는 것이 꼭 잘못된 것만도 아니라는 것도 알려 주었다. 오히려 내가 나도 모르게 자꾸 눈길을 주게 되는 이유는 내가 그쪽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하셨다. 상무님의 말을 듣고 부서 이동을 하게 되었고, 마케팅에서 일하면서 내가 브랜딩과 광고에서 다루는 요소들에 얼마나 매력을 느끼고 그 일에 관심이 있는지를 깨달았다.


중요한 것은 광고 자체가 아니라 광고를 어떻게 다루는지 였다. 광고 본래의 목적은 제품을 만드는 사람이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과 연결해 주는 것이다. 과거에는 광고가 무조건 좋아 보이는 것으로 포장해서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을 사게 만드는 경향이 있었지만 요즘은 사람들이 현명해져서 브랜드와 관계없이 합리적인 소비를 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이제는 타겟 마케팅이 가능해지면서 더 이상 1%를 위한 브랜드를 99%에게 광고하면서 위화감을 주는 행태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나는 마케팅이 가지고 있는 감성적인 측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우리 집안 분위기는 굉장히 보수적이고 딱딱한 편이었고, 나는 가질 수 없는 그것을 보면서 숨겨진 열망을 혐오로 표현했던 것이다.    

우리의 그림자는 남을 통해 투영된다 

이렇게 극단적인 혐오가 사실은 자신이 갈망하는 것에 대한 표출이라는 증거는 곳곳에 있다. 정치권에 보면 부정부패를 욕하던 사람이 세력을 갖게 되었을 때 누구보다도 부정부패를 더 많이 저지르지 않던가. 그리고 회사에서 누군가를 굉장히 혐오하며 욕하고 다니는 사람이 잘 살펴보면 본인이 그것과 똑같은 성향을 가지고 있는 경우를 종종 본다. 내 안에 잠들어 있는 본모습을 자극하지 않는 것이라면 우리는 사실 그렇게까지 혐오하지 않는다. 내가 부정하고 있는, 혹은 아직 발견하지 못한 무의식 영역에 존재하는 나의 이면을 남을 통해서 발견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극단적으로 싫어하거나 극단적으로 우상화하게 된다. 이것을 심리학에서 그림자 이론이라고 한다.


누구나 그림자가 있다. 그런데 이것을 거부하고 부정할 때 우리는 세상에 혐오하는 것, 저주하는 것, 두려워하는 것이 너무 많아진다. 그런데 이런 그림자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삶을 끌어안게 된다. 세상을 극단적인 좋고 싫음으로 나누지 않기에 타인에게서 발견되는 추한 모습이건 내 안에서 스스로에게 발견하는 실망스러운 모습이건 모두 두려움 없이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내가 광고업을 혐오하던 마음을 돌리고 광고에 대한 관심을 가지면서부터는 광고가 사회에 이로운 방향으로 써질 수 있도록 힘썼던 것처럼 우리는 내가 혐오하고 부정하고 싶은 면을 끌어안을 때 진정으로 완성된 나를 만나서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 있다.

    

누군가가 너무나 싫어서 괴로운가? 

많은 사람들이 내가 너무나 싫어하는 누군가 때문에 혹은 나를 너무나 싫어하는 누군가 때문에 회사생활을 힘들어한다. 근데 그 불편한 감정 뒤에는 내가 인정하지 못한 나의 잠재적인 능력, 그리고 내가 컨트롤하지 못하는 내 안의 어두운 성향에 대한 두려움이 숨어 있을 수 있다. 당신도 혹시 누군가로 인해 너무나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가? 그렇다면 자신을 한번 깊이 들여다보자. 내가 무언가를 억누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자. 그리고 밖으로 나서서 누군가에게 그에 대한 욕을 하기 전에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그 모습이 바로 나에게도 있는 것은 아닌지 곰곰이 생각해 보자. 그리고 웬만하면 그 사람에 대한 욕하는 것을 멈추어 보자. 누군가는 당신이 욕하는 것을 보면서 당신에게 그것과 똑같은 단점을 발견하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나의 그림자는 나보다 다른 사람 눈에 더 잘 보이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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