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헤엄치며 살아가는 중
솔직함보다 더 사랑에 위험한 극약은 없다.
죽는 날까지 사랑이 지속된다면 죽는 날까지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절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주지 못한 채 살게 될 것이다.
사랑은 나를 미화시키고 왜곡시킨다.
사랑은 거짓말의 감정을 극대화시키는 무엇이다. - 본문 p.212
사랑은 언제나 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는다.
마음은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한다.
하지만 내면의 감정은 과거에 머무르기를 바라기도 하고 현실은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끌고 간다.
양귀자의 장편 소설 <모순> 속 주인공인 안진진은 이런 모순적인 사랑을 한다.
그녀를 사랑한다고 하는 두 남자.
김장우와 나영규.
이 두 남자는 극명하게 다른 성향이다.
성격도, 집안도, 일을 대하는 태도, 하물며 사랑하는 방식마저도 대비된다.
그녀는 두 남자 사이에서 갈등한다.
하나는 자신의 감정이 잔잔히 기울었던 야생화 같았던 김장우,
다른 하나는 현실적인 의지로 그녀를 향해 직진으로만 달려온 나영규다.
직진하는 화살표와 희미한 화살표 사이에서 진진은 자신이 "사랑했다"라고 말하는 김장우가 아닌, "살아낼 수 있을 것 같은" 나영규를 택한다.
그녀의 이 선택은 모순처럼 보일 수 있다.
김장우는 그녀에게 사랑의 설렘을 주고 동시에 불확실함을 안겨준다.
친구처럼 편하지만 연인이라고 하기엔 뭔가 어긋나기만 하는 거리감.
그의 존재를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강함보다 약함을 편애하고 뚜렷한 것보다 희미한 것을 먼저 보며, 진한 향기보다 연한 향기를 선호하는 세상의 모든 희미한 존재들을 사랑하는 문제는 김장우가 가지는 삶의 화두다."
희미한 화살표는 명확히 어디로 향하는지 보여주지 않는다.
그녀는 그 모호함을 오랫동안 끌어안았지만 인생은 그러하지 못했다.
반면, 나영규는 그러한 점에서 정반대다.
그는 멈추지 않는다.
그녀를 향한 자신의 감정도 태도도, 미래에 대한 계획도 모두 직진이다.
그러한 명료함에 진진은 거부감을 가지기도 당황스러워도 한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직진의 길을 택한다.
이 선택은 어쩌면 두 여자의 인생.
그녀의 엄마와 이모의 삶에 대한 자신의 답이었을 수도 있다.
어린 시절부터 진진은 이 둘의 삶을 모두 보아왔다.
진진의 엄마는 가난한 삶이었지만 뜨거운 사랑을 믿었다.
엄마는 흔들리는 가정, 결핍의 일상 속에서도 마음의 불꽃은 꺼뜨리지 않았던 인물이다.
진진은 아마도 엄마의 삶 속에서 안정이라는 단어를 원하고 또 원하며 살았을 것이다.
반면, 이모는 무미건조하고 풍요로우며 안정적인 삶이 그려진다.
이런 이모를 보며 진진은 사랑이 없어도 가능한 결혼을 보아왔을 것이다.
사랑은 설렘이지만, 삶은 지속이다.
진진은 그것을 일찍 깨달았다.
결국 진진은 어머니의 사랑을 닮은 김장우.
감정에 충실하지만 삶에 대한 책임이 불투명한 사람이 아닌
이모의 안정적인 삶인,
현실적이고 명확한 선을 가지고 직진하는 나영규를 택한다.
나영규를 선택함에 있어 진진에게 사랑이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랑은 복잡한 감정과 다양한 형태로 우리에게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녀 진진은 말한다.
사랑은 결국 다음의 네 가지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온다고.
첫째,
집에서나 회사에서나 거리에서나 비어 있는 모든 전화기 앞에서 절대 자유롭지 못한 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기다림이다. 전화기가 울릴까 한없이 전화기만 바라보게 되는 것을 그녀는 전화의 구속은 점령군의 그것보다 더 집요하다고 한다.
둘째,
모든 유행가의 가사에 시도 때도 없이 매료당하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을 하면 노래가 온통 내 이야기 같다. 유행가는 사랑을 시작한 사람들에게 대물림되는 우리의 유산이라고 표현한다.
셋째,
발견할 수 있는 모든 거울 앞에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지 않고 무심히 지나칠 수 없게 만드는 것이 사랑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자신의 얼굴이 궁금해진다. 누군가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게 되기 때문이다. 거울 앞에서 상대방이 보는 나를 상상하며 함께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넷째,
붉은 신호등이다. 켜지기만 하면 무조건 멈춰버리는 위험을 예고하면서 동시에 안전도 예고하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위험과 안전을 동시에 가져다준다. 김장우와의 사랑이 위험을 의미하는 불안이었다면, 나영규와의 사랑은 눈에 확실하게 보이는 안전이었다. 진진은 결국 붉은 신호등을 보고 멈추게 되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이 네 가지 메모는 안진진의 사랑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사랑임을 보여준다.
하지만 사랑은 항상 모순 속에 있다.
그녀의 사랑법 또한 그래서 모순적이다.
마음은 한쪽으로 기울었지만, 몸은 다른 방향으로 걸어간다.
그러나 그것은 위선도 회피도 아니다.
<모순>이라는 제목처럼,
안진진은 그 모순을 껴안은 채 살아가기를 택했다.
흔들리지만 쓰러지지 않으려는, 복잡하지만 현실적인, 슬프지만 단단한 그녀만의 사랑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