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춰버린 빨강 - 1
“어제 울었어?”
“눈이 왜 이렇게 부었어?”
"라면 먹고 잤니?"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니며 숱하게 들었던 말이다.
내 눈은 정확히 말하면
내 눈꺼풀은 다른 아이들보다 유난히 두껍고 무거웠다.
쌍꺼풀도 없다 보니 두꺼비 눈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 탓에 눈도 작아 보이고 늘 졸린 사람처럼 보였는지도 모른다.
어릴 적부터 그건 그 어느 것보다도 나에겐 큰 콤플렉스였다.
거울을 볼 때마다
사진을 찍을 때마다
난 그게 싫었다.
중학교 1학년 영어 시간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나는 맨 뒷 줄에 앉아 조용히 수업을 듣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영어 선생님이 교실 뒤편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교실 뒤편 책상 위에는 매일 주번이 물을 담아놓은 주전자가 놓여 있었다.
선생님은 그 주전자를 들고 오더니 물을 내 머리에 붓는 것이었다.
내 앞에 들고 올 때까지도 그 물이 나에게 덮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난 누구보다도 열심히 영어 문장을 보면서 필기하고 있었기에.
믿기지가 않았다.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수업 시간에 왜 졸아! 내 수업이 그렇게 재미없어?”
“하여간 공부 못하는 애들은 꼭 저래!”
나는 졸지 않았다.
눈이 무거웠을 뿐이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순간의 수치심과 치욕, 억울함은 내 안에서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날 이후 난 영어를 포기했다.
영포자가 되었다.
학년이 올라가고 다른 과목의 성적은 쑥쑥 올랐지만
영어만큼은 항상 그 자리에 멈춰 있었다.
아직도 억울하다.
그날이 없었더라면 나도 영어를 잘했을까?
지금은 영어 울렁증으로 알던 것도 말하지 못하게 되었다.
어느 날,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나는 왜 눈이 이래?”
엄마는 잠시 말을 잊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 순간 내가 지금껏 알지 못했던 진실이
나에겐 하나의 콤플렉스였던 눈이
엄마에겐 아픈 상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처음 들려준 이야기.
중매결혼을 하였던 엄마는 결혼하기 전에는 알지 못했던 아빠의 무능함과 무책임.
그로 인해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못하고 나를 품었다고 한다.
그래서였을까.
병원이 아닌 집에서 태어났던 나는 세상에 나오자마자 눈을 뜨지 못했다고 했다.
그 모습을 본 할머니는 엄마에게
“이 아이는 살 가망이 없다”
“그냥 뒤집어 놓고 내버려 둬라”라고 했다고 한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머리가 띵! 하며 내가 잘못 들었을 거라 생각했다.
아마 내가 사내아이였다면 할머니는 이렇게 단칼에 말하지 않았겠지.
남아선호사상의 유교적인 관념을 유달리 강하게 내세웠던 할머니는
아들 없이 딸만 내리 셋을 낳은 어머니가.
그리고 태어난 내가 얼마나 미웠을지 가늠이 되고도 남는다.
남아선호사상은 예전에 동아시아에서 주로 일어났던 일이지만, 지금은 거의 사라져 가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인도나 남아시아 쪽에서는 아직도 이러한 남아선호로
여아 살해, 여아 낙태 등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이 얼마나 인권을, 사회적 자유를 박탈하는 것인가 말이다.
하지만 엄마는 차마 그렇게 할 수 없었다고 한다.
태어난 나를 품에 안고
3일 내내 눈에서 흘러나오는 고름 같은 분비물을 닦아주었다고 한다.
눈을 뜨지 않은 작은 어린 생명이 칭얼대지도 울지도 않고,
꼬물대면서 조용히 숨만 내쉬는 모습이 엄마에겐 이렇게 들렸단다.
마치 '나 살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리고 사흘째,
마침내 내가 눈을 떴다.
그 말을 듣고 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엄마도 미안함인지 잘 커줘서 고마움인지 한동안 말없이 눈물만 훔치셨다,
그런 내 눈을 다시 보게 되었다.
이 두꺼운 눈꺼풀은 살아남기 위해 버틴 흔적일지 모른다.
울지도 않고, 징징대지도 않고
그저 조용히 숨 쉬고 있던 아기.
살고 싶었던 아이.
그게 나였다.
엄마는 내게 말하셨다.
“네가 유독 유순하고 울지 않았던 건, 할머니의 말을 알아들은 것 같아서 그랬을 거야.”
살고 싶어서 조용히 버텼던 아기.
이제는 더 이상 눈을 콤플렉스로 삼지 않기로 했다.
이 눈은 내가 살아온 시간의 흔적이고 엄마의 사랑이 만들어낸 첫 번째 기적이다.
40년 넘게 눈이 나빠 안경을 내 분신처럼 함께 해 왔지만
단 한 번도 불편하다거나 불평하지도 않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을 볼 수 있음에 감사하면서 살았다.
나는 내가 살아낸 시간과 나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사람들을 기억하며
내 삶을 더 단단하게, 더 따뜻하게, 살아내기로 했다.
엄마에게, 그리고 지금은 하늘나라에 계시지만
그때 나를 조용히 지켜봤을 할머니에게도
말한다.
“제가 잘 살아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