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 조종사.
그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벅차오르던 시절이 있었다.
어린 날, 아버지는 일곱 남매가 한자리에 모이면 늘 스미스 비행 쇼 이야기를 꺼냈다. 마치 어제 본 듯 생생하게 눈앞에 펼쳐 보이는 이야기였다.
“그날 커티스 비행기가 머리 위를 스치고, 하늘 높이 아찔하게 솟구쳐 오르는 기세가 어찌나 장하던지. 온 마을 사람이며 동네 강생이까지 다 뛰어나와 봤제. 연기로 꼬부랑 글씨도 쓰고, 심지어는 비행기 날개에 사람을 세워 날아다녔다 아이가. 야드라, 상상이나 해 보겠나.”
아버지의 말이 끝나기 전에 둘째 오빠가 반짝이는 눈빛으로 손을 번쩍 들었다.
“아부지요! 내가 비행기 조종사 될랍니다. 하늘 높이 날아서 묘기도 하고, 돈도 많이 벌 거 아입니꺼.”
“그래, 기식이 니가 해뿌라마. 까짓거. 사내가 한번 태어나 뭘 못하겠노. 니가 내 아들인데 뭔들 못하겠노. 허허.”
아버지의 호탕한 웃음에 우리 칠남매도 따라 껄껄 웃어댔다. 아무것도 모르는 막내마저 까르르 웃으며 오빠에게 박수를 쳤다. 그 순간만큼은 오빠가 이미 조종사가 되어 내일이라도 하늘로 떠날 듯 믿어 의심치 않았다. 서로를 믿어주는 가족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든든했고, 집안 풍경은 따뜻했다. 아궁이 앞에서 묵묵히 장작을 넣던 엄마도 우리를 바라보며 살며시 미소 지었다.
둘째 오빠는 마당에서 쌀가마니를 들썩이며 씨름을 시작했다.
“아까버라! 내가 이 쌀가마니만 번쩍 들어올리면 비행기 탄다, 합격이다!”
온몸이 땀에 젖도록 가마니에 매달린 오빠는 숨을 몰아쉬며 외쳤다.
“오빠야, 그 가마니만 들면 진짜 비행기 탈 수 있나?”
“그래. 번쩍 들면 합격, 그 다음은 독일이지! 조금만 기다려라. 내가 꼭 해 낼 끼다.”
그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우리는 모두 그 말을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빠는 정말 독일행 길을 잡았다. 비록 조종간을 잡는 일은 아니었지만, 그는 광부의 신분으로라도 비행기를 타고 떠날 수 있다는 사실에 들떠 있었다.
“비행기를 타는 것만으로도 꿈이 반은 이루어진 기라.” 그는 그렇게 말하며 씩 웃었다.
처음엔 엄마도 만류했다. 하지만 독일에서 광부로 1년만 일하면 가족이 5년은 살 수 있다는 말 앞에서는 누구도 그를 붙잡을 수 없었다. 천 미터 지하, 40도를 넘는 열기와 석탄가루 속. 허리조차 펼 수 없는 갱도에서 광부들이 서로 건네던 인사, ‘글뤽아우프’—살아서 돌아오라는 말. 그 인사가 왜 필요한지, 듣는 이의 가슴은 서늘해졌다. 그럼에도 오빠는 떠났다. 우리 집을 지탱할 유일한 희망이었고, 그의 젊음은 아직 꺾이지 않았으니까.
두 번의 겨울이 흐른 뒤, 독일에서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어머니, 저는 이곳에서 억울한 일을 겪었습니다. 동포들에게 심판을 받아 강물에 몸을 던져야 했을 때, 오히려 저를 건져낸 건 독일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 동포가 더 무섭다는 사실에, 이제는 고향으로 돌아갈 용기가 나질 않습니다.
어무이, 이곳에서 저를 믿어주는 여인을 만났습니다. 저와 같은 길을 걸으며 밤낮 아픈 사람을 돌보는 분입니다. 우리는 작은 서약을 맺고 이제 미국으로 떠나려 합니다. 고향의 산은 잊었지만, 제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미국에서 다시 시작해 보려 합니다. 부디 건강하이소.
— 둘째 기식 올림.
편지를 쥔 손끝이 떨렸다. 우리 집의 ‘비행기 조종사’는 이제 비행기를 타고 더 먼 나라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오빠가 곁에 있는 듯 조용히 속삭였다.
“오빠야, 부디 미안해하지 말고 훨훨 날아가라. 삶은 결국 끝이 있다는 걸 잊지 말고, 한 번 태어난 김에 하고 싶은 거 다 해보라. 네 꿈이 무엇이든, 꼭 이루어내라.”
둘째 오빠 덕분에 막내까지 대학을 꿈꿀 수 있게 되었다. 끝없는 뜨거운 어둠 속에서 버텨준 그의 시간이 막내의 꿈을 지켜 주었다. 희생이라면 희생이고, 억울하다면 억울할 수 있겠지만, 결국 새로운 인생을 열어 준 것은 오빠의 도전과 용기, 그리고 두려움 속에서도 피어난 가족애였다.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도 내 인생을 찾을 수 있을까. 오빠처럼 쌀가마니를 들어 올려 보기라도 했어야 했을까. 그래도 오빠 덕에 온몸의 붓기가 가라앉았고, 연이어 한약을 먹으며 조금씩 회복할 수 있었다. 몸이 거의 회복되자 나는 다시 동생들의 대학살림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대구로 향했다.
대구로 가는 버스 안, 창가에 비친 내 얼굴은 오래된 흑백사진처럼 빛바래 있었다. 그 낯선 얼굴에 나는 묻고 또 물었다. 나는 꿈이 있었던가. 아니, 내 꿈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있었던가.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는 달랐다. 웃음소리와 호탕한 격려 속에서 우리는 저마다의 꿈을 꿀 수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집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엄마는 더욱 굳게 입을 다물고 일만 했고, 큰언니와 큰오빠, 그리고 나까지 이를 악물며 그 곁을 지켰다. 웃을 틈도, 꿈을 이야기할 겨를도 없었다.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는 남아 있었다. 둘째 오빠가 비행기 조종사가 되겠다던 그날, 모두가 눈을 빛내며 박수를 치던 순간. 그때, 우리 모두에게 물어봤더라면—각자의 꿈을 꺼내 놓을 수 있지 않았을까. 나에게도 물어봤더라면, 나는 뭐라고 대답했을까.
나는 답을 찾지 못한 채 다시 묻는다.
네 꿈은 무엇이냐고. 또, 내 꿈은 무엇이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