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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츤데레 Apr 21. 2018

5. 관계의 시작과 끝

님과 남의 사이에 있는 한 개의 점은 생각보다 크지만 가볍다

흔히들 '님'과 '남'은 점 하나 차이라고 많이 이야기한다. 눈으로 봐도 딱 점 하나 차이이니 달리 할 말 없이 동의하는 수밖에 없는 표현이다. 그러나 그 점 하나에는 생각보다 많은 일들이 스며들어 있고, 점을 찍는 촉매제는 생각보다 가벼운 일인 경우가 많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서 썸을 타고 연애를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님'과 '남'을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오늘도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 이전 연애에서의 되돌리고 싶었던 시간을 반추하면서도, 그때 이랬으면 어땠을까 하면서 'should have+pp'를 속으로 말하면서도 그런 생각을 한다. 복잡하게 생각하면 한없이 복잡하다. 그렇지만 단순하게 바라보고자 하니, 정말이지 심플했다.




우리는 우리의 관계에서 할 수 있는 일이 그다지 없다.


사람이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데, 저게 뭔 개소리냐고 하는 사람도 있겠다. 물론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운명적인 무언가가 있다고 믿기는 하지만, 결국 사람이 노력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부류였다. 그래서 잘 되고 싶은 이성을 만나면, 그녀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했고 열심히 썸을 탔다. 실패도 많이 했지만, 그래도 잘 풀린 경우도 꽤나 있어서 몇몇의 '님'들과 연애하며 (양다리 혹은 바람은 없었다.) 서른을 바라보는 지금까지 살아왔다.


전형적으로 평범한 남자의 삶과 연애의 이야기였다. 잘 보이고 싶어 왁스를 바르다가 잘 안돼서 약속시간 20분 전에 머리를 다시 감은 적도 있으며, 우연으로 시작하는 인연을 말하고 싶어서 그녀가 자주 가는 카페를 나의 단골집으로 만들기도 했다. 집까지 데려다주고 싶어서 멀쩡한 치안을 자랑하는 서울을 고담시로 묘사하기도 했으며, 찌질한 핑계를 담아 퇴근 후에 동선이 겹치니 밥이나 먹자고 구질 거리 기도해봤다. 남을 님으로 만들고자 하는 나의 노력을 귀엽게 봐준 고마운 사람들과는 긴 시간은 아닐지 모르지만 연애를 하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노력하면 다 되는 줄 알았다.


옷깃을 잡으려고 정말이지 많은 노력을 하며 발버둥 쳤다, 아니 지금도 치고 있다.


그래서 발버둥 쳤다. 잘 해보고 싶었기에 말이나 행동이 앞섰던 기억이 많다. 그저 내 기준에서 잘 해주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적이 대부분이다. 머리로는 ‘잘 해주는 거보다는 상대의 입장에서 그녀가 싫어하는 걸 하지 않는 게 더 우선하다.’ 고 생각하면서도 말이다. 난 결론적으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주고 싶은 것을 주었다. 관계의 측면에서 노력하는 남자로 포장하고 싶었지만 나는 그저 징징거리는 이기적인 어린애 정도에 불과했다.





나는 존나 피곤한 놈이다.


친구들이 나한테 많이들 하는 이야기다. 저 말을 곱씹다보면 요즘 드는 생각이 있다. 내가 스스로에게도 상대방에게도 공간을 주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항상 상대의 마음을 얻기(?) 전에는 조급하고 서두르고, 서로가 서로의 님이 되고 나면 이를 잃을까 봐 불안해 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나는 항상 힘들었다. 스스로의 공간마저 갉아먹고 잠식하는 성격 탓이라고 생각하며 차차 나아지겠거니, 했다. 언젠가는 고쳐지겠지, 시간이 지나면, 나이가 먹으면, 사람들을 만나며 관계에 익숙해지면.. 하면서 말이다.


낙관적인 관점의 뒷면에는 무책임함이 자리하고 있다. 내가 그랬던 것 같다. 나의 이러한 성격이 상대까지 갉아먹을 수 있다는 것까지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스스로의 짐은 상대에게로 가서 더 커진다는 것을 몰랐다. 너무 마음이 아팠지만, 깨달았을 때는 항상 늦었다. 나는 그렇게 가장 소중한 사람의 마음을 찢어 놓았고, 또다시 이별을 겪었다. 헤어지고 나서 이렇게 후회만 하고 있다.


여태껏 내가 겪는 이별의 슬픔 때문에 힘들었다. 이별을 말하는 상대방의 담담함에, 이별 후에는 함께 했던 거리를 지나칠 때 들리는 듯한 웃음소리에, 아침에 일어났을 때 나의 기상 소식을 궁금해하는 카톡이 없다는 것에 슬펐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상대에게 준 상처를 생각하며 죄책감에 고개를 들기 어렵다. 너무도 죄스러운 마음에 생각할수록 눈물만 맺힐 것 같다. 개인주의적이지만 이기주의적인 사람은 아니라고 자부했기에 더 자괴감이 든다. 너무 생각이나 배려 혹은 존중이 없이 살았다.




어머니가 매번 하는 말씀이 있다. 침묵이 주는 여유와 공간, 그리고 그 무거운 메시지에 대한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논리적인 말이나 유려한 표현보다는 때로는 침묵하는 것이 더 큰 메시지이면서, 상대방을 편하게 기댈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 그 말씀의 요이다. 그러면서 매번 드는 예시가 있다. 성격이 전혀 다른 두 남녀가 30년을 함께한 부부가 되는 데에 큰 기여를 했던 사건이다.


요즘 표현으로 썸을 타던 무뚝뚝한 남자와 똑 부러지는 여자는 냉면집에 갔다. 전적으로 여자의 의견이었고, 남자는 불만 없이 근처를 한참 찾다가 적당해 보이는 냉면집을 찾았다. 남자는 비빔냉면을, 여자는 물냉면을 시켰다. 기다리던 냉면이 나오자, 여자는 미소를 띠며 한 젓갈을 집어 입에 넣었다. 제주도의 바닷바람 같은 시원함을 기대했던 여자의 미소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비릿한 느낌이 너무 강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남자는 아무 말하지 않고 그릇을 바꾸어 만둣국을 여자에게 주었다. 그리고는 조용히 냉면 한 그릇을 비웠다.


이 이야기를 마칠 때마다 어머니가 항상 사족처럼 덧붙이는 질문이 있다. 너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는 것이다.


“너라면 다른 메뉴 시킬까? 뭐가 좋을까? 하면서 재잘대지 않았을까 싶다.”


“그게 뭐? 시킨 거 맛없으면 다른 거 물어봐서 시켜주면 되는 거잖아.”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냥 바꿔주면 되는 거야. 굳이 나 때문에 여기 온 건데 네 아빠가 너처럼 재잘거렸으면 미안하고 민망해서 기분 더 별로였을 것 같아.”


맨날 웃고 넘긴 이야기였다. 그런데 이제는 웃지 못하겠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미 지나간 일에는 후회를 잘 안 하는 편인데, 이 이야기를 곱씹을수록 후회만 늘어간다. 정말로 미안한 사람이 있기 때문일까. 스스로 뿐만이 아니라 아끼는 사람까지 피곤하게 한 내가 답답할 따름이다.




인연이란 정말 마음대로 안되는 것임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은 피천득의 <인연>이다. 여러 권 사서 아끼는 친구들에게 선물할 만큼 좋아한다. 그의 삶과 그 속에서 만난 인연들에 대한 수필을 모아둔 책인데, 읽을 때마다 느낌이 다르다. 고등학교 때 처음 읽은 뒤로 자주 다시 읽는다. 요즘은 통독하진 않지만, 여운이 남는 부분을 발췌독 한다. 그 정도로 좋다.


그중에서도 제일 좋아하는 부분은 위의 저 부분이다. 누구나 그리워하는 사람은 있다. 그런데 그리워한다고 다 만나서 얼굴을 보고 술 한 잔 기울이며 대화하진 못할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만날 수 있어도 자연스럽지 않은 인위가 인연을 헤칠 수 있다는 걸 알기에 배려의 의미로 그리움을 참기도 한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애타는 감정만이 전부가 아님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인연이라는 것은 상대를 생각하는 게 중요함을 알기에 말이다.


나는 그런 점이 부족했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나야 해결될 일을 내 조급한 노력으로 바꿔보려고도 했고, 당장의 그리움을 못 참고 준비가 안 된 상대에게 짐을 주기도 했다. 12년 전부터 저 글귀를 알고 되뇌어왔지만, 난 그냥 내 위주로 편한 행동만 했던 것이다. 게으른 기만자가 아닐 수 없다.




님을 남으로, 남을 님으로 만드는 것은 시간이다.


두 사람의 관계에는, 그리고 인연에는 자신만 있는 것도 아니고 상대만 있는 것도 아니다. 그 둘만 있는 것 역시 아니다. 수많은 사람과 사건, 상황들까지 더해져 있다. 나 자신 조차 마음대로 못하는 게 세상 일인데 그 많은 변수들을 어떻게 다 컨트롤할 수 있을까. 그건 그냥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자신감 넘치게도, 혹은 오만하게도 내가 노력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내가 노력해서 꽃을 준비하고, 꾹꾹 눌러쓴 손 편지를 준비하면 뭔가 바뀌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인생은, 그리고 인연은 그렇지가 않았다. 내가 뭘 해도 상대가 준비가 안되면 아무 소용이 없었고, 상황이 쓰레기 같으면 될 일도 어그러졌다.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이 많음을 깨달았을 때 나는 발버둥 쳤고, 그 발버둥은 노력이라기보다는 상대에게 부담으로 다가선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시간이 인연을 만들어간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친한 형 J가 나한테 말했듯, 'Right things happen at the right time.' 이 맞는 표현일 것이다. 그의 말처럼, 일어나야 할 바른 일들은 우리의 의지나 노력과는 상관없이 알맞은 타이밍에 일어나며, 혹여 그게 일어나지 않으면 그게 바로 THE RIGHT THING인 것이다. 그저 그렇게 생각하면서 자신에게도, 그리고 상대에게도 공간을 주면 될 일인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앞으로는 그렇게 해보고자 한다.




혹자는 우리의 삶의 주인이 우리가 아니고 시간이나 타이밍이라는 이야기냐, 라고 항변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런 방향으로 빠져서 우리가 모든 행동을 무의미하게 취급하자는 말은 아니다. 우리가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인연을 대할 때는 너무 거대하니, 조금 물러나자는 것이 나의 논지이다. 우리는 그 소소한 행위나 사건 자체를 컨트롤하려고 하기보다는, 시간이 말해주는 올바른 타이밍일 때에 준비되어 있을 수 있도록 노력하면 된다. 나의 진정한 인연인 사람은 미리 알람을 해놓고 나타나지 않기에, 그녀를 만날 언젠가를 위해서 내가 스스로 인격도야를 하면 된다는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그러한 준비의 일환으로 침묵을 배우고자 한다. 말을 줄이고 글을 늘리고자 한다. 그러다 보면 상대에게도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여유를 주는 그런 사람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요즘도 글을 쓰다 보니 차분함을 많이 느낀다. 조금 더 익숙해지면 예전에 만나던 사람이 나에게 이야기했던 내면의 평화 inner peace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나를 위해서도,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도 그걸 얻으려는 나름의 노력을 치열하게 할 생각이다. 시간이 나에게 맞는 남을 님으로 바꿔줄 수 있을 여력이 생길 때까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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